Source: Korean Film Archive (KOFA) collection register, via data.go.kr
Collection names and descriptions are shown in the archive's original Korean; no English version is 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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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33518) / 1953년 5~6월 정전회담에 참석하는 미군 해리슨(Harrison) 장군과 대니얼스(Daniels) 제독, 국군 김원무 제독과 북한인민군 남일 등 양측 고위 인사들의 영상을 담고 있다. 이때의 회담장소는 현재의 판문점이 아니라 초기의 임시 판문점이다. 지금의 판문점은 1953년 7월 28일 정전협정문 2조 19항에 의거해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9월 19일 현재의 판문점을 구성하는 최초의 건물 6채가 완공되었다.
판문점/DMZ · 정전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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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33640) / 이 영상은 1953년 8월 21, 24일에 일반포로교환 작전(Operation Big Switch)에 따라 북한인민군 포로들이 함선(127호)으로 호송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포로들이 함선에서 포로구역(cage)으로 이동하는 모습, 식사를 위해 밥통과 반찬통 등을 옮기거나 밥통을 설거지하는 모습, 하선한 뒤 트럭에 탑승해 판문점으로 이동하는 모습, '미제국주의자들이여 조선 강토에서 물러가라'라는 종이현수막을 들고 있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들이 담겼다. 일반포로교환 작전은 유엔군 관할 제1거제도 및 제8제주시포로수용소의 북한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송환포로, 북·중국군 관할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을 판문점에서 1:1 방식으로 교환하는 것이었다. 포로교환 작전계획에서 유엔군사령부와 한국통신지대(한국관구기지사령부)는 포로들의 집단적 반항 및 정치적 프로파간다 활동 가능성을 사전에 철저히 봉쇄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전쟁포로 · 일반포로교환 작전(Operation Big Sw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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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428-NPC-5974) / 이 영상은 1953년 9월 21일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장에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북한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비송환 포로들을 중립국지대로 이송한 결과를 브리핑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원형 탁자의 중앙에 중립국송환위원회(Neutral Nations Repatriation Commission, NNRC) 위원장 코덴데라 수비야 티마야 중립국송환위원회 위원장(중앙)과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들이 앉아 있는 가운데, 티마야 위원장이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북한인민군 포로들을 중립지대에 이송을 완료했다는 발표를 한다. 이후 대표단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판문점을 떠난다. 슬레이트가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영상은 제304통신작전대대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대는 1953년 4월과 9월 포로송환, 판문점의 군사정전위원회 등을 촬영하고 1954~66년까지 용산기지 캠프 코이너에 본부를 두었다.
전쟁포로 · 비송환포로 분리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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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34796) / 1954년 1월 20일 중국인민지원군 비송환포로들이 문산리 판문점 인근 유엔군 관리 지역에서 트럭을 타고 출발하는 모습을 기록한 영상이다. 비송환포로들은 판문점 인근의 중립국송환위원회 본부의 통제를 받으며 90일 간 자유-공산진영 대표의 설득에 응하며 숙려기간을 거친 후 최종적으로 거취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제3국인 타이완 또는 중국 본국 송환을 결정한 포로들은 인천항에 집결한 후 목적지로 떠났다. 1950년 10월 20일에 과거 국민당군 출신이거나, 동북항일연군이나 팔로군에서 활약한 조선인(연변 거주자), 일본 관동군 출신 포로들(초기 6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10월 31일 11명의 중국인민지원군 포로가 발생한 뒤 1953년 3월까지 21,063명으로 증가했다. 민간정보교육국은 모든 포로를 대상으로 반공주의 재교육과 중국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정치교화프로그램을 자발적이지 않고 강제적으로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들은 재교육 프로그램 찬성과 반대라는 첨예한 대립속에서 갈등과 시위, 살인과 자살 사건을 겪었다. 결국 1951년 11월부터 1952년 1월, 4~7월 두 차례 미군은 재교육을 반대한 송환포로와 미송환 포로를 재심사와 분리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유엔군3제주모슬포수용소(비송환, 1952년 4월)와 유엔군제주시3A수용소(지금의 제주공항 인근 용담동, 송환, 1952년 7~8월)를 각각 건설해 관리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포로교환 협상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중국인민지원군 부상포로(1,030명)와 일반포로(5,640명) 총 6,670명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잔류한 미송환포로 14,342명은 중립포로위원회에서 재차 중국과 유엔군의 강제적 설득을 통해 중국과 타이완행을 선택해야 했다. 그 결과 비송환포로 14,220명 중 14,066명은 1954년 1월 20일 인천항에서 전체 3개 집단(A, B, C)으로 나눠 출발해 1월 25일 A와 B집단, 26일 C집단이 각각 기륭항에 도착했다. 나머지 부상포로들은 미군사원조단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타이완 정부에 명령으로 약 2주 동안 ‘자유의 마을(Freedom Village)’ 양메이(약 5,000명)와 두부(약 9,000명)에서 재교육을 받았다.
전쟁포로 · 비송환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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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34797) / 1954년 1월 20일 중국인민지원군 비송환포로들이 트럭에 실려 문산리 임시포로수용소로 들어가는 모습, 북한인민지원군 비송환포로들이 포항으로 이동하기 위해 열차에 탑승하는 장면 등이 기록된 영상이다. 1950년 10월 20일에 과거 국민당군 출신이거나, 동북항일연군이나 팔로군에서 활약한 조선인(연변 거주자), 일본 관동군 출신 포로들(초기 6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10월 31일 11명의 중국인민지원군 포로가 발생한 뒤 1953년 3월까지 21,063명으로 증가했다. 민간정보교육국은 모든 포로를 대상으로 반공주의 재교육과 중국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정치교화프로그램을 자발적이지 않고 강제적으로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들은 재교육 프로그램 찬성과 반대라는 첨예한 대립속에서 갈등과 시위, 살인과 자살 사건을 겪었다. 결국 1951년 11월부터 1952년 1월, 4~7월 두 차례 미군은 재교육을 반대한 송환포로와 미송환 포로를 재심사와 분리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유엔군3제주모슬포수용소(비송환, 1952년 4월)와 유엔군제주시3A수용소(지금의 제주공항 인근 용담동, 송환, 1952년 7~8월)를 각각 건설해 관리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포로교환 협상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중국인민지원군 부상포로(1,030명)와 일반포로(5,640명) 총 6,670명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잔류한 미송환포로 14,342명은 중립포로위원회에서 재차 중국과 유엔군의 강제적 설득을 통해 중국과 타이완행을 선택해야 했다. 그 결과 비송환포로 14,220명 중 14,066명은 1954년 1월 20일 인천항에서 전체 3개 집단(A, B, C)으로 나눠 출발해 1월 25일 A와 B집단, 26일 C집단이 각각 기륭항에 도착했다. 나머지 부상포로들은 미군사원조단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타이완 정부에 명령으로 약 2주 동안 ‘자유의 마을(Freedom Village)’ 양메이(약 5,000명)와 두부(약 9,000명)에서 재교육을 받았다.
전쟁포로 · 비송환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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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34793) / 이 영상은 1954년 1월 20일 중국인민지원군 비송환포로들이 수용된 인천 부평 애스컴 시티 포로수용소의 모습, 포로들이 입소하거나 희망지로 석방되어 출발하는 모습들을 기록했다. 1950년 10월 20일에 과거 국민당군 출신이거나, 동북항일연군이나 팔로군에서 활약한 조선인(연변 거주자), 일본 관동군 출신 포로들(초기 6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10월 31일 11명의 중국인민지원군 포로가 발생한 뒤 1953년 3월까지 21,063명으로 증가했다. 민간정보교육국은 모든 포로를 대상으로 반공주의 재교육과 중국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정치교화프로그램을 자발적이지 않고 강제적으로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들은 재교육 프로그램 찬성과 반대라는 첨예한 대립속에서 갈등과 시위, 살인과 자살 사건을 겪었다. 결국 1951년 11월부터 1952년 1월, 4~7월 두 차례 미군은 재교육을 반대한 송환포로와 미송환 포로를 재심사와 분리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유엔군3제주모슬포수용소(비송환, 1952년 4월)와 유엔군제주시3A수용소(지금의 제주공항 인근 용담동, 송환, 1952년 7~8월)를 각각 건설해 관리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포로교환 협상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중국인민지원군 부상포로(1,030명)와 일반포로(5,640명) 총 6,670명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잔류한 미송환포로 14,342명은 중립포로위원회에서 재차 중국과 유엔군의 강제적 설득을 통해 중국과 타이완행을 선택해야 했다. 그 결과 비송환포로 14,220명 중 14,066명은 1954년 1월 20일 인천항에서 전체 3개 집단(A, B, C)으로 나눠 출발해 1월 25일 A와 B집단, 26일 C집단이 각각 기륭항에 도착했다. 나머지 부상포로들은 미군사원조단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타이완 정부에 명령으로 약 2주 동안 ‘자유의 마을(Freedom Village)’ 양메이(약 5,000명)와 두부(약 9,000명)에서 재교육을 받았다.
전쟁포로 · 비송환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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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34791) / 1954년 1월 20일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 비송환포로들이 판문점에서 정식으로 송환 절차를 마치고 각기 인천항으로 호송되거나 문산에서 열차편으로 포항으로 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이다. 판문점에 위치한 유엔군사령부 송환위원회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태운 트럭이 출발하고,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파주 봉일천을 지나 인천 부평 애스컴시티를 거쳐 인천항에 도착한다. 인천항에는 학도호국단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충정지사는 공산당과 러시아에 맞서자(反共抗俄忠貞志士)”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으며 성조기, 학생과 시민들이 타이완 기, 유엔기, 태극기를 들고 모여 있다. 1950년 10월 20일 과거 국민당군 출신, 동북항일연군이나 팔로군에서 활약한 조선인(연변 거주자), 일본 관동군 출신 포로들(초기 6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10월 31일 11명의 중국인민지원군 포로가 발생한 뒤 1953년 3월까지 21,063명으로 증가했다. 민간정보교육국은 모든 포로들 대상으로 반공주의 재교육과 중국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정치교화프로그램을 강제적으로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들은 재교육 프로그램 찬성과 반대라는 첨예한 대립 속에서 갈등과 시위, 살인과 자살 사건을 겪었다. 결국 1951년 11월부터 1952년 1월, 4~7월 두 차례 미군은 재교육을 반대한 송환포로와 미송환 포로를 재심사와 분리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유엔군 제3제주모슬포수용소(비송환, 1952년 4월)와 유엔군제주시3A수용소(지금의 제주공항 인근 용담동, 송환, 1952년 7~8월)를 각각 건설해 관리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포로교환 협상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중국인민지원군 부상포로(1,030명)와 일반포로(5,640명) 총 6,670명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잔류한 미송환포로 14,342명은 중립포로위원회에서 재차 중국과 유엔군의 강제적 설득을 통해 중국과 타이완행을 선택해야 했다. 그 결과 비송환포로 14,220명은 인천항을 통해 타이완 지륭항과 미군사원조단 비행장에 도착했으며 한 섬에서 집단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전쟁포로 · 비송환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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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306.8411) / 주한 미공보원이 제작한 이 영상은 북한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을 1949년 8월 12일의 제네바 제3협약에 따라 등록, 포로집결소에서 임시포로수용소를 거쳐 정식 포로수용소로 이송하는 장면, 집결소에서 임시등록하고 간단한 심문 절차를 거쳐 포로 태그를 발급하는 장면, 수용소에서 DDT 소독하는 장면, 포로들에게 의복과 식기 등을 지급하고 신체검사와 지문채취 후 정식 등록하는 장면 등을 담고 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제네바 협약의 조항을 내세우고 있으며, “1949년 60여 개국에서 서명한 협정은 포로에 대한 인도적이고 훌륭한 대우를 규정하고 있다. 개별 조항은 포로의 삶과 모든 단계를 다루고 있어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군인으로서의 권리에 적절한 존중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해설이 나온다. 실제로 미국 의회는 제네바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으나 영상은 미국에서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고 정해진 절차에 따른다는 인상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 영상에서는 “여성 포로들은 그들의 성별에 대해 모든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모든 편의 시설이 완비된 별도의 수용동에 수용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국제적십자 보고에 따르면 “제2부산포로수용소 여성구역의 수용동에서 여성포로들이 생리대를 요구하거나 여성 경비원을 요청해도 묵살되었다.”
전쟁포로 · 유엔군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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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38577) / 1955년 8월 13일 인천 월미도 미 공군기지 내 중립국감독위원회 폴란드, 체코 대표의 숙소 앞에서 벌어진 공산권 위원 반대 시위, 그리고 8월 14일 군산 미 공군기지 등에서 벌어진 중감위 위원 철수 시위를 담고 있다. 경기도 어민회, 반공청년 자치지위대 등 각종 단체들은 월미도 앞 바다의 해상시위를 통해 중립국감시위원회의 폴란드, 체코 위원들을 ‘적성감시위원’으로 지칭하고 이들의 철수를 요구했다. 또한 월미도-인천항을 연결하는 돌제에 대한상이용사회 서울지부와 제대장병보도회 양주분회, 양주소방대 등의 단체가 “폴란드 체코 추방”이나 “정전조약을 파기한 적성감시위원국”, “공산침략자의 적성감시원국을 배격하자”라는 각종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에 미군 8224헌병대 등은 시위대에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시켰다. 14일 군산과 강릉의 시위 장면에서는 시위의 규모도 크고 격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이 시위 진압을 위해 물대포, 최루탄 등을 준비하여 모습도 포착된다. 시위 참가자들 다수가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이 일련의 시위들이 이승만 정권과 언론이 함께 기획해 공산권 출신의 중립국감시위원들에 대한 중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철수시키기 위한 압박수단으로 이용한 관제데모였기 때문이다. 8월 2일부터 부산, 군산, 인천 월미도에 참여한 시위자들이 두 국가의 위원들에게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는 등 시위는 격화되고 있었다. 이에 미군은 두 국가의 위원들을 미군기지로 피신시켜야 했고, 한국 우익단체 등은 미군기지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당시 한국정부는 체코와 폴란드가 북한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적성국가’이며 소련이나 중국의 지령을 받아 미국의 우방국가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방해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판단했다.
판문점/DMZ · 적성 중립국감독위원 철수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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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3750) / 이 영상은 한국전쟁 발발 10주년인 1960년에 촬영된 것으로 이 시기까지 여전히 남아 있는 전쟁의 여파를 확인하게 해준다. 지금의 김포공항 자리에 있던 미공군기지(K-14)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관제탑 건물의 총탄 흔적 등이 매우 자세하게 담겨 있고 당시 이곳에 여객터미널이 있었다는 점도 간판 및 표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영상의 뒷부분은 새롭게 건설된 미군 기지의 깨끗한 모습과 비무장지대 제214감시초소에서 미군들이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 그리고 군사분계선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군사분계선’ 간판을 미군들이 살펴보는 장면 등이 담겨 있다. 영상 속의 군사분계선 간판은 이 시기에 역시 두 줄 철조망과 함께 설치되어 있으며, 이 두 줄 철조망이 분계선 경계를 따라 이어지고 있어 철책이 설치되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판문점/DMZ · DMZ 순찰 · 김포 미공군기지(K-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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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4330) / 1953년 7월 22일에 군사분계선의 위치와 남북 경계가 최종 합의된 7년 후 시점, 즉 1967년 비무장지대 전체에 철책과 초소가 만들어지기 전의 DMZ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이다. 파주 문산 일대에서 DMZ 너머 북한 쪽의 마을과 민가들, 사람들과 건물, 북한의 산 등을 촬영하고, 이어 남쪽 마을 근처의 수풀 사이에 멈춰 서 있는 녹슨 열차 차량의 모습, DMZ를 순찰하는 미군 군용 차랑, 관측일지를 작성하는 헌병의 모습, 통신을 하는 군인 등의 모습이 수록됐다.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수풀 곳곳에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판문점/DMZ · DMZ 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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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34792) / 1954년 1월 20일 중국인민지원군 비송환포로들이 서울역 앞의 대형 기념 아치를 통과하며 타이완 깃발과 각종 문구를 적은 피켓을 들고 나온 시민들의 환호를 받는 장면, 북한인민군 비송환포로들이 탄 열차가 용산역에 정차하자 수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는 모습 등, 비송환포로들의 송환(영상의 슬레이트에는 Operation Comeback 혹은 Operation Recovery로 표기됨)을 다루고 있는 영상이다.
전쟁포로 · 비송환포로 석방
MK064366_P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