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봉Stillscopies: 2
문예봉(1917~1999)은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다시 한번 이규환의 <나그네>(1937)로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왕평, 독은기 등과 함께 <나그네>와 <군용열차>(서광제, 1938)의 후반작업으로 일본에 가기도 했다. 『삼천리』에 따르면 "<나그네>를 상영한 메이지좌는 개관 이래 처음 보는 초만원"이었으며, "그 만원의 8할까지는 조선사람"으로 "문예봉의 인기는 하늘에 뜬 별" 같았다고 한다(『삼천리』 제9권 제4호, 1937년 5월 1일). 이후 문예봉은 도호와의 제휴영화 <군용열차>에 다시 한번 출연하면서 일본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된다. <군용열차>의 제휴로 경성에 온 도호의 배우들은 문예봉을 "스타스럽지 않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는... 동양적이며 상냥한" 배우라고 평했다(『도호영화』, 193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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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Stillscopies: 2
문예봉(1917~1999)은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다시 한번 이규환의 <나그네>(1937)로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왕평, 독은기 등과 함께 <나그네>와 <군용열차>(서광제, 1938)의 후반작업으로 일본에 가기도 했다. 『삼천리』에 따르면 "<나그네>를 상영한 메이지좌는 개관 이래 처음 보는 초만원"이었으며, "그 만원의 8할까지는 조선사람"으로 "문예봉의 인기는 하늘에 뜬 별" 같았다고 한다(『삼천리』 제9권 제4호, 1937년 5월 1일). 이후 문예봉은 도호와의 제휴영화 <군용열차>에 다시 한번 출연하면서 일본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된다. <군용열차>의 제휴로 경성에 온 도호의 배우들은 문예봉을 "스타스럽지 않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는... 동양적이며 상냥한" 배우라고 평했다(『도호영화』, 193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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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Stillscopies: 2
문예봉(1917~1999)은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다시 한번 이규환의 <나그네>(1937)로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왕평, 독은기 등과 함께 <나그네>와 <군용열차>(서광제, 1938)의 후반작업으로 일본에 가기도 했다. 『삼천리』에 따르면 "<나그네>를 상영한 메이지좌는 개관 이래 처음 보는 초만원"이었으며, "그 만원의 8할까지는 조선사람"으로 "문예봉의 인기는 하늘에 뜬 별" 같았다고 한다(『삼천리』 제9권 제4호, 1937년 5월 1일). 이후 문예봉은 도호와의 제휴영화 <군용열차>에 다시 한번 출연하면서 일본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된다. <군용열차>의 제휴로 경성에 온 도호의 배우들은 문예봉을 "스타스럽지 않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는... 동양적이며 상냥한" 배우라고 평했다(『도호영화』, 1938년 5월호). 영화 <그대와 나>(허영, 1941) 촬영 때에는 화신백화점과 미쓰코시백화점이 의상을 협찬했는데, 이 사진의 오른쪽 하단에 화신백화점의 로고가 압인돼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배우 · 초상 · 화신백화점 사진부 촬영 · 온라인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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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Stillscopies: 2
문예봉(1917~1999)은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다시 한번 이규환의 <나그네>(1937)로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왕평, 독은기 등과 함께 <나그네>와 <군용열차>(서광제, 1938)의 후반작업으로 일본에 가기도 했다. 『삼천리』에 따르면 "<나그네>를 상영한 메이지좌는 개관 이래 처음 보는 초만원"이었으며, "그 만원의 8할까지는 조선사람"으로 "문예봉의 인기는 하늘에 뜬 별" 같았다고 한다(『삼천리』 제9권 제4호, 1937년 5월 1일). 이후 문예봉은 도호와의 제휴영화 <군용열차>에 다시 한번 출연하면서 일본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된다. <군용열차>의 제휴로 경성에 온 도호의 배우들은 문예봉을 "스타스럽지 않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는... 동양적이며 상냥한" 배우라고 평했다(『도호영화』, 1938년 5월호). 영화 <그대와 나>(허영, 1941) 촬영 때에는 화신백화점과 미쓰코시백화점이 의상을 협찬했는데, 이 사진의 왼쪽쪽 하단에 화신백화점의 로고가 압인돼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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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채Stillscopies: 2
박기채 감독(1907~) 결혼식 사진(1940년 11월 23일). 일본 교토 동아키네마에서 감독 수업을 받고 귀국 후 안석영 각본의 <춘풍>(1935)으로 조선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무정>(1939), <조선해협>(1943) 등을 연출했다. 박기채 감독 결혼식의 또 다른 사진이 "영화제작자 이재명 컬렉션"에도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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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월영Stillscopies: 2
배우 서월영(1904~1973)에 대해 심훈은 "의외로 동작이 판에 박은 듯이 부드럽지 못"한데, 이는 그가 연극배우 출신이어서라고 분석한다(『동광』 제23호, 1931년 7월호). 서월영은 영화 <병정님>(방한준, 1944)에서 독은기가 연기한 야스모토 에이치의 아버지를 연기했다. 이때 독은기는 34세(1911년생), 서월영은 41세(1904년생)였다. 서월영에 대해 박기채는 "氏[씨]가 영화계에 나온 지가 조선 영화 역사가 생기면서부터라면 오늘날 氏가 가진 존재는 그리 쉽게 다른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존재일 것"이라며, "아무러한 名優[명우]라도 役[역]을 선택 잘못하면 반다시 실튀¨하는 법이다. 月影[월영]씨에게 이러한 우려가 없지 않다. 氏[씨]인들 어찌 銀幕[은막]에서 청춘을 驅歌[구가]하고 십지 않으랴마는 이러한 役[역]을 맞는다는 것은 氏에게는 絶大禁物이[절대금물]"이라고 언급했다(박기채, 「조선남녀영화배우 인물평」, 『삼천리』 제13권 제6호, 1941.06.01). * [ ]의 내용은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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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월영Stillscopies: 2
배우 서월영(1904~1973)에 대해 심훈은 "의외로 동작이 판에 박은 듯이 부드럽지 못"한데, 이는 그가 연극배우 출신이어서라고 분석한다(『동광』 제23호, 1931년 7월호). 서월영은 영화 <병정님>(방한준, 1944)에서 독은기가 연기한 야스모토 에이치의 아버지를 연기했다. 이때 독은기는 34세(1911년생), 서월영은 41세(1904년생)였다. 서월영에 대해 박기채는 "氏[씨]가 영화계에 나온 지가 조선 영화 역사가 생기면서부터라면 오늘날 氏가 가진 존재는 그리 쉽게 다른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존재일 것"이라며, "아무러한 名優[명우]라도 役[역]을 선택 잘못하면 반다시 실튀¨하는 법이다. 月影[월영]씨에게 이러한 우려가 없지 않다. 氏[씨]인들 어찌 銀幕[은막]에서 청춘을 驅歌[구가]하고 십지 않으랴마는 이러한 役[역]을 맞는다는 것은 氏에게는 絶大禁物이[절대금물]"이라고 언급했다(박기채, 「조선남녀영화배우 인물평」, 『삼천리』 제13권 제6호, 1941.06.01). * [ ]의 내용은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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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평Stillscopies: 2
왕평(1907~1940)은 1932년에 폴리돌레코드 조선 지점 초대 문예부장을 역임한 후 영화계에 입문해, 영화 <나그네>(이규환, 1936)와 <군용열차>(서광제, 1938)에 출연했다. 그가 출연한 <나그네>가 큰 성공을 거둔 후에도 왕평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1938년 <군용열차>의 제휴 상담을 위해 경성을 방문한 도호의 다니구치 센키치(谷口千吉)는 경성호텔에 머물렀는데, 상담이 끝나는 혹한기의 밤 1시에도 왕평은 경성호텔에서 그의 집까지 항상 걸어다녔다는 일화가 있다(『東映[도호영화]』, 1938년 4월호). 한편 왕평은 "온후하고 독실하며 건전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불굴의 정신력은 지금 조선예술가들의 인망을 혼자서 짊어지게 하고 있다"고 평가 되었다(『東映[도호영화]』, 1938년 4월호). 그가 출연한 또 다른 작품, <군용열차>는 <나그네>로 큰 성공을 거둔 성봉영화원의 두번째 작품이었고, 도호와의 합작으로도 기대를 모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도호에서는 제휴 담당으로 조감독인 다니쿠치 센키치를 경성으로 보냈고, 배우 사사키 노부코(佐木信子)와 고바야시 주시로(小林重四郞)를 특별출연시켰다. 사진의 뒷면에는 "조선영화계 대표적 남자 배우"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한편 사진 앞면 오른쪽 하단에 도쿄 아오야마의 한 사진관 이름이 압인된 것으로 보아, 사진은 도쿄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왕평은 <나그네>(이규환, 1936)와 <군용열차>(서광제, 1938) 후반 작업 때 문예봉 등과 함께 도쿄에 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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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룡Stillscopies: 2
이금룡(1906~1955)은 나운규 프로덕션에 있을 때부터 "노역을 전담하야 매우 원숙한 연기를 보엿"는데 "〈어사 박문수〉를 감독 주연하려다 선전까지 해놓고"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동광』 제23호, 1931년 7월). 영화감독 박기채는 이금룡에 대해 "오랜 시일동안 조선영화를 위해 싸워왔다"고 하며, 평소의 그는 "겸손하고 온후하고 무언주의로 실질주의"라고 평했다(박기채, 「조선남녀영화배우 인물평」, 『삼천리』 제13권 제6호, 1941.06.01). * [ ]의 내용은 편집자 주. 이금룡은 니시키 모토사다 각본의 <병정님>(방한준, 1944)에서 동네 어르신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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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용Stillscopies: 2
배우 이원용(1906~1950)에 대해 소설가겸 영화평론가 심훈은 "유도 잘한다는 활극 배우"로 평가했다(『동광』, 제23호, 1931년 7월). 이원용의 연기가 호평을 받게 된 것은 영화 <인생항로>(안종화, 1937)에서 였는데 "빈틈없는 연기-이 사람은 배우로서 노련한 것"이 안종화 감독과 대조되며, "만내리즘에 걸리지 않코 나아갈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아프로 큰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호평을 받았다(『조선일보』 1937.02.18). 영화감독 박기채는 이원용에 대해 "舞聲映畵 時代[무성영화 시대]에 맹활약을 하든 분이다. 發聯 映畵[발연 영화]로 되면서부터는 氏[씨]의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이 섭섭한 일이나 氏는 자타가 모다 認證[인증]하는 영화배우다. 氏가 출연한 영화로 가장 가까운 영화라면 「人生航路[인생항로]」일 것이다. 그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셈이나 氏인들 어찌 고민이 없을 것이리요. 모다가 조선 영화계가 불건전한 罪[죄]일 것이다. 어서 氏에게 옛날과 같은 힘찬 활약의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고 평했다(박기채, 「조선남녀영화배우 인물평」, 『삼천리』 제13권 제6호, 1941.06.01). * [ ]의 내용은 편집자 주. 사진 왼쪽 하단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로고가 압인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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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Stillscopies: 2
〈그대와 나〉(허영, 1941)에 출연한 일본 배우 고스기 이사무(小杉勇, 1904~1983, 사진 중앙)와 제작자 이창용(1906~1961, 사진의 2열), 각본가이자 기획자인 김정혁(1915~, 사진의 우2)이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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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택원Stillscopies: 2
무용가 조택원(1907~1976)은 영화 <병정님>(방한준, 1944)에 출연한 바 있다. <병정님>에는 조택원 이외에도 소프라노 마금희, 테너 히라마 분주(平間文壽), 바이얼니스트 계정식, 만주영화협회의 스타 이향란 등이 출연하여 총 10여분에 걸친 위문공연 장면이 펼쳐진다.
무용 · 공연 · 온라인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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