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rce: Korean Film Archive (KOFA) collection register, via data.go.kr
Collection names and descriptions are shown in the archive's original Korean; no English version is 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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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UCLA Film & Television Archive (ID: HNR 25.234) / 오늘의 뉴스(News of the Day) 시리즈의 하나로 제작된 뉴스릴 영상으로, 두 가지 소식으로 구성돼 있다. 첫 소식은 이승만 대통령이 맥스웰 테일러 미8군사령관의 안내를 받으며 피난민에게 주택공간으로 제공하게 주택단지를 살펴보는 순간을 담고 있다. 당시에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의 수는 500만 명에 달하고 있어 무엇보다 거주지 공급이 절실하던 때였다. 한국 정부가 전시에 미군 병영으로 사용되던 서울 근교의 건물들을 인수하여 피난민들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다음 소식은 북한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가 남한으로 온 두 명의 국군포로 귀환자가 3년 만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과 재회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포로 송환 문제는 1953년의 정전 협정 회담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었던 사안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국군 실종자를 8만 2,000여 명으로 추산했지만, 실제로 송환된 국군 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고, 수많은 국군 포로들이 송환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라진 국군포로’에 대한 유엔군의 문제 제기에 대해, 북한은 국군포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대응하던 상황이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수 개월이 지난 후에 제작된 이 뉴스릴 필름은, 북한에 억류된 미귀환 국군포로가 적지 않음을 알리면서 북한이 부정했던 국군포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UCLA Film & Television Archive · 1953 · 전재민 주택 보급 · Hearst Corporation · Hearst Metrotone Newreel Collection - News of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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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로그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111-LC-31752) /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와 중면 중사리 사이의 임진강을 따라 자리잡은 대노리(Big Nori)-소노리(Little Nori) 고지에서는 1952년 12월 11일 밤 중공군 2개 중대의 공격으로 시작하여 14일까지 이어진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 이 단 4일 동안 유엔군이 퍼부은 화력은 포격 120,000회, 박격포 31,000회, 전차포 4,500회에 달했고 중공군도 도합 18,000회의 포와 박격포 공격을 했다. 이곳은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였으나 중공군이 1953년 1월 중에 2개 소대 규모의 정찰대를 파견했고, 이에 대해 국군 1시단 11연대가 1월 23일에 3개 소대 규모의 습격대로 적 벙커를 파괴하고 중공군을 패퇴시킨 후 안전하게 철수했다. 이 1월 전투에는 국군 외에 유엔군의 근접항공지원, 포대, 박격포 및 전차 지원이 있었다. 1월 22일부터 23일에 촬영된 이 영상은 이 1월의 고지전 최전방의 현장을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전투를 준비하는 광경과 전투 당일 인근 임진강변의 전차와 참호, 부교와 LVT(수륙장갑차)를 통한 국군의 기동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National Archives · 1953 · 고지전 · 미 육군 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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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111-LC-31968) / 전방 항공관측부대 촬영병이 포토텐트와 간이비행장을 오가며 촬영한 필름을 맡기는 모습, 현상이 완료된 사진을 받아 군단 정보참모부 사진판독실에 맡기고 항공지도를 받아 일선 정찰부대에 전달하는 모습 등을 연출해 촬영한 푸티지로서 다른 영상(111-LC-31969)으로 이어진다.
National Archives · 1953 추정 · 항공정찰 · 미 육군 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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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111-LC-31969) / 1953년 2월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의 관측 및 통신 활동 모습을 기록한 영상으로서 다른 영상(111-LC-31968)으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이다. 관측병과 촬영병이 L-19 관측기에서 K-20 카메라를 들고 전방지역을 비행하며 항공사진을 촬영하며, 교대 출격은 간이비행장의 관제소 통신병이 중계하고 있다.
National Archives · 1953 추정 · 항공정찰 · 미 육군 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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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111-LC-35130) / 6.25전쟁의 정전 이후에도 한국에 잔류하고 있던 미군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먼로를 섭외하여 기획된 1954년 2월의 미군위문협회(USO) 순회공연 일부 실황 기록영상이다.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신혼여행으로 도쿄에 체류 중이었던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는 2월 16일에 C-54 수송기 편으로 K-16 여의도공항으로 입국, 2월 19일까지 3박 4일동안 10여 군데 이상의 미군 부대를 순회하며 총 1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군인 관객 앞에서 공연했다. 일정 내내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부인인 진 오둘(Jean O’Doul)이 동행했으며, 육군 피아니스트 알버트 과스타페스테(Albert Guastafeste)와 이 공연의 이름을 그대로 딴 군인 밴드 ‘Anything Goes’가 함께 공연했다. 이 순회공연은 역대 USO 위문 공연 중에서도 역사에 남을 인상적인 행사로 평가되며, 우울한 성장기와 결혼생활을 보냈고 평생 연기보다는 성적 대상으로 부각되는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했던 마릴린 먼로 자신으로서도 큰 위로를 받은 순간이었다고 후술하고 있다. 이 영상에는 내한 일정 중 3일차인 2월 18일, 미 제2보병사단 주둔지의 가설무대 ‘불도저 보울’(Bulldozer Bowl)에서의 공연 장면과 지프차 퍼레이드 모습이 담겼고, 영상 중간에 약 2분 가량은 2월 17일 저녁에 미 제25보병사단에 헬리콥터로 도착한 모습이 포함됐다. 당시는 군사경계선과 전후 기지 구축, 주한 미군의 역할 변경 및 재배치 등이 한창이었고 마릴린 먼로의 동선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어 방문한 부대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려우나, 이 두 부대는 대략 중부전선의 문산-연천-포천-철원 지역 중에 서로 인접하여 배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는 미국 내와 해외 기지에 주둔하는 미군을 격려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창설된 비영리단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에 YMCA, YWCA, 구세군. 유대인 복지 위원회, 카톨릭 공동체 자선단체, 여행자 원조 협회 등의 6개의 봉사단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군을 위한 USO의 여러 지원 활동 가운데 본래의 임무를 수행한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행사는 위문공연이었다. 전선에 있는 장병들에게 라이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캠프 쇼는 USO의 창설 초기부터 기획되어, 1941년부터 1947년까지 425,000회 이상의 공연이 열렸으며 쇼에 참가한 연예인의 수는 7천 명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USO 쇼는 중단되었지만, 한국전쟁에 미국이 참여하면서 다시 복원되었다.
National Archives · 1954 · 미군위문협회(USO) · 미 육군 통신대
MK064476_P01
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111-LC-34997) / 1954년 2월 19일에 촬영된 전반부는 영등포 국정교과서 인쇄공장 건설현장을 담은 것이다. 최신 인쇄시설을 갖춘 이 공장은 여러 단체의 후원 하에 건설되었는데, 한국 정부와 대한문교서적회사가 자금을 투입했고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13만 달러를 원조하였으며 유네스코가 10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완공은 같은 해 9월에 이루어졌다. 1954년 2월 17일에 촬영된 후반부에는 비송환포로 76명(북한군 74명, 국군 2명)이 인도를 제3국으로 택한 것에 대해 700여 명의 반공애국청년단이 주도한 시청광장 궐기대회 및 가두행진 모습이 담겼다. 인도군은 중립국송환위원회 의장국 자격으로 6.25전쟁의 비송환포로를 관리하고 있었다. 문제의 포로들은 이틀 뒤인 2월 21일에 인도군과 함께 판문점에서 열차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하여 인도행 여객선에 오르게 된다.
National Archives · 1954 · 반공시위 · 미 육군 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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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UCLA Film & Television Archive (ID: HNR 31.271) / 이 영상은 오늘의 뉴스(NEWS of the DAY) 시리즈의 하나로 제작된 뉴스릴이며, 1960년 4월혁명 당시 학생들과 시민들의 항의 시위 장면과 거리의 모습, 경찰의 진압 장면 등을 담고 있다.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몸싸움이 벌어지고 경찰이 학생과 시민들을 체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당시의 고조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미군의 지프차와 트럭 등이 불타는 장면, 시민들이 트럭에 타고 행진하는 장면이 이어져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준다.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행진하는 장면에 이어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시민들이 도망치는 급박한 장면으로 영상이 마무리된다. 4월혁명은 1960년 3월 15일에 진행된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 자행된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하여 독재정권 타도로 이어진 시민혁명이었으며, 이승만의 하야로 귀결되었다. 선거 직후부터 마산과 경남 지역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이어졌고,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서울 시내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귀가하던 학생들이 대한반공청년단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4월 19일에는 ‘이승만의 하야’와 ‘1인독재 물러가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시위가 확대되었다. 경찰은 공포탄과 최루탄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실탄을 사용해 무차별 발포를 함으로써 1백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게 된다. 또한 정부는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영상에서는 질서가 회복되기까지 최소 115명이 사망하고 거의 8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영상은 계엄령 이후에도 시민들의 시위와 항의가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UCLA Film & Television Archive · 1960 · 4.19혁명 · Hearst Corporation · Hearst Metrotone Newreel Collection - News of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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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UCLA Film & Television Archive (ID: HNR 24.282) / 정전협정이 임박한 1952년 6월 9일에 협상 회의가 열리는 판문점의 풍경과, 서울에서 휴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오늘의 뉴스’(News of the Day) 뉴스릴 시리즈의 한 대목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은 통일 없는 휴전안을 반대하고 그 안의 수정을 요구하는 조건들을 제시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어 시민들이 중앙청 근처에서 휴전협정에 반대하며 가두시위를 벌이는데, "통일 없는 휴전은 삼천만의 죽엄이다(GIVE US UNIFICATION OR DEATH)"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 중앙청 건물 중앙에는 태극기와 함께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 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으며, 서대문구와 마포구 등 지역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든 많은 시민들이 휴전안 반대집회를 위해 집결해 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한국전쟁의 조기종결, 현전선에서의 휴전, 군사력에 의한 통일의지 포기를 천명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1951년부터 전국민적 “휴전반대, 전쟁계속, 북진통일” 운동을 전개하며 유엔과 미국의 정책과 대립된 입장을 견지해왔다. 영상 속의 시위는 휴전협정안이 대한민국 주권을 무시한 일방적이고 굴욕적인 것이라며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부 주도의 관제적인 성격 또한 없지 않았다.
UCLA Film & Television Archive · 1953 · 휴전반대시위 · Hearst Corporation · Hearst Metrotone Newreel Collection - News of the Day
MK064485_P01
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306.5303) / 해방 이후 분단을 둘러싼 포츠담 회담, 미소공동위원회, 유엔총회, 남한 단독 총선거, 정부 수립 등의 일련의 사건들과 6.25전쟁의 발발 및 전개 과정을 차례로 짚어가며 유엔군 파병의 정당성과 자유진영의 수호자로서의 미국의 이미지를 설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선전 다큐멘터리이다. 1945년 미군의 한반도 주요 지역 촬영사진부터 시작하여 주요 사건에 대한 뉴스릴 푸티지, 6.25전쟁 이후의 미군 내 각종 촬영 조직, 그리고 1955년 경으로 추정되는 전후 시기의 푸티지들을 늘어놓으면서 다소 강한 표현의 해설로 흐름을 이끄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용된 푸티지들은 주로 육군 통신대를 통해 축적된 촬영본이고, 이 영상과 거의 동일한 판본이 미 공군이 관리하던 영상(342-USAF-43193)에 존재한다. 다만 이 영상은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분단을 초래했으며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서 맞서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자유진영 여러 국가에 전파하기 위해 미 해외공보처(USIA)가 각국 언어로 번역하여 배급한 것이다. 1954년 6월 18일 인적자원연구소(Institute for Research in Human)가 이 영상에 대한 분석과 설문조사 등을 정리한 문서가 남아 있는데, 특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핀란드, 인도, 이란, 이라크, 태국, 터키에서 상영한 결과와 반응 등을 다루고 있다.
National Archives · 1954 · 선전 다큐멘터리 · 미 해외공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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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111-LC-34115) / 1952년 10월부터 약 1년 간 추진된 ‘Yongsan Project(용산 프로젝트)’, 즉 용산기지 재건 및 미군 재배치 계획이 75% 이상 진행된 1953년 8월 초 시점에 이와 관련한 새 통신시설을 설치, 운용하는 모습을 담은 일련의 기록영상(111-LC-34115, 111-LC-34116, 111-LC-34117, 111-LC-34118) 중 하나이다. 용산 프로젝트는 전, 후방으로 나뉘어 있던 미8군 지휘소를 단계적으로 용산으로 통합 이전하여 상설기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대구 후방지휘소의 군수참모부(G4) 및 기술병과부서가 먼저 용산으로 재배치되고 이어 행정병과부서, 그 다음으로 서울대 문리대 건물(현 마로니에공원 예술인의 집)의 전방지휘소가 용산에 합류하기로 예정됐다. 전방지휘소는 실제로 이 영상이 촬영된 다음 달에 용산으로 재배치되므로 이 즈음에 대구 후방지휘소 병과는 이미 용산에서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상에서는 전방지휘소 촬영 장면의 슬레이트에 ‘8A Forward’(미8군 전방)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앞의 추정에 따르면 슬레이트에 ‘8A Rear’로 표기한 장면은 대구 후방기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후방기지에서 용산기지로 이전한 통신센터’ 또는 '동숭동 전방지휘소 대비 후방에 구축 중인 용산기지'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도 통신시설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장면이 담겨 있기도 하다. 한편, 통신시설 구역의 복구작업은 용산 프로젝트에서 전기, 수도, 난방 등 기간시설 다음으로 최우선순위로 추진되어 이미 1952년 10월 16일에 완료됐고 위치는 용산기지 North Post 구역의 북단, 이후 캠프 코이너(Camp Coiner)로 명명된 부지였다. 이 영상은 1953년 8월 초 시점에서 용상의 캠프 코이너 통신센터가 구축되는 모습과 이 구축 프로젝트가 완료되기 전까지 기존의 동숭동 전방지휘소 통신센터가 계속 운용되고 있는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National Archives · 1953 · 기지 통신센터 구축 · 미 육군 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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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111-LC-30697) / 미 제226통신대대가 1952년 5월 12일에 ‘펀치볼(Punch Bowl)’로 불리는 강원도 양구군의 산악분지에서 미군과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 KSC)이 공중 트램카(Aerial Tramway)를 사용하여 군수 물자를 나르고 부상병을 이동시키는 모습을 촬영한 짧은 푸티지이다. ‘펀치볼(Punch Bowl)’은 해발 약 450m의 분지 지역이고 주위가 모두 해발 1,000m가 넘는 가파른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지형에 대해 당시 미군 종군기자가 마치 화채를 담는 그릇처럼 생겼다는 의미로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1951년 8월 31일에 시작되어 9월 21일에 종료된 ‘펀치볼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한국전쟁에서 했던 마지막 공세로, 가장 치열하고 필사적인 격전이자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다.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가파르고 협소하여 보급이 어려운 산악지대는 한국 고지전에서 미군이 맞닥뜨린 까다로운 현안 중 하나였다. 6.25전쟁 기간 중 벌어진 산악지대의 전투 중에서도 양구군의 산악지역은 피의 능선 전투, 도솔산 전투, 가칠봉 전투 등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던 대표적인 곳이었다. 이 영상에서는 미군이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보급과 부상병 후송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중 트램을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National Archives · 1952 · 보급 · 미 육군 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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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ID: 111-LC-30189) / 육군 특파원 젠킨스 중위가 미 육군 제2보병사단에 배속 프랑스대대의 대대장인 프랑수아 보레유(Franois Borreil) 중령을 인터뷰한 영상이다. 그는 1951년 12월 1일, 제1차 프랑스대대 총사령관 몽클라르 중령으로부터 주한 프랑스군 지휘권을 인계받고 제2차 파병 프랑스대대의 대대장에 취임하여 미 제2보병사단 제23보병연대 배속으로 곧바로 철의 삼각지(철원-평강-김화) 작전에 투입됐다. 이 영상은 잠시 가평군 북단 죽둔리(현 북면)으로 물러나 배치됐을 때의 대대본부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며, 바로 다음 달인 7월 17일에 철의 삼각지 서쪽 티본 능선(T-bone Ridge) 전투, 10월 6일에서 10일까지 펼쳐진 화살머리 고지 방어전 등에서 활약하게 된다. 인터뷰에서 보레유 중령은 짧은 영어를 제외하면 불어로 진행하는데, 프랑스 대대의 훈련 방식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대대장을 맡기 전에 제1차 프랑스대대가 참여했던 쌍굴전투, 지평리 전투, 펀치볼 전투 등 1951년의 주요 활약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National Archives · 1952 · 참전 유엔군 · 미 육군 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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