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료Stills
『고려영화협회와 영화신체제 1936~1941』(한국영상자료원, 2007)에 수록된 도와상사의 관계 자료를 보면, 도와상사는 고려영화협회와의 협조적인 관계로 배급을 추진한 <수업료>의 사전 홍보에 많은 공을 들였다. 조선 아동의 수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점을 강조해 일본 관객에 친숙한 일본영화 <글짓기교실 綴方敎室>(1938)에 견주어 ‘반도의 <글짓기교실>’로 소개하며 여러 차례 시사회를 개최했고, 요코미쓰 리이치(光利一), 니와 후미오(丹羽文雄) 같은 소설가들의 짧은 감상평을 홍보에 활용했다. 요코미쓰 리이치는 “이 반도의 <글짓기 교실>은 느긋하다. 궁박한 느긋함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생각을 새로 하게끔 여유를 주는 것이, 영화 중 영화로서 무기를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위의 책, 71쪽)라고 소감을 남겼다. 도와상사가 시사회의 호의적인 반응을 전시하면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수업료>는 영화의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비일반영화’로 검열을 통과해 일본에서는 아동이 볼 수 없는 영화로 분류되었고, 결국에는 일본 공식 개봉도 좌절되었다.
1940년대 · 수업료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149605_06
수업료Stills
『고려영화협회와 영화신체제 1936~1941』(한국영상자료원, 2007)에 수록된 도와상사의 관계 자료를 보면, 도와상사는 고려영화협회와의 협조적인 관계로 배급을 추진한 <수업료>의 사전 홍보에 많은 공을 들였다. 조선 아동의 수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점을 강조해 일본 관객에 친숙한 일본영화 <글짓기교실 綴方敎室>(1938)에 견주어 ‘반도의 <글짓기교실>’로 소개하며 여러 차례 시사회를 개최했고, 요코미쓰 리이치(光利一), 니와 후미오(丹羽文雄) 같은 소설가들의 짧은 감상평을 홍보에 활용했다. 요코미쓰 리이치는 “이 반도의 <글짓기 교실>은 느긋하다. 궁박한 느긋함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생각을 새로 하게끔 여유를 주는 것이, 영화 중 영화로서 무기를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위의 책, 71쪽)라고 소감을 남겼다. 도와상사가 시사회의 호의적인 반응을 전시하면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수업료>는 영화의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비일반영화’로 검열을 통과해 일본에서는 아동이 볼 수 없는 영화로 분류되었고, 결국에는 일본 공식 개봉도 좌절되었다.
1940년대 · 수업료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236805_04
복지만리Stills
영화 <복지만리>(전창근, 1941)의 장면 사진. 조선을 넘어 일본과 만주까지 시장을 확장하고자 했던 고려영화협회의 대작 프로젝트였던 <복지만리>는 만주영화협회와 합작한 ‘선만(鮮滿)영화의 첫 악수’로 홍보되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또 만주로 떠도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그려, 만주 이주 정책 등의 시국에 부합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시나리오 집필에서 개봉까지 2년 5개월이 걸렸고, 총 제작비 10만 원이 투여되었으며, 조선, 일본, 만주를 배경으로 한 로케이션 촬영과 최초의 크레인 촬영을 시도했다. 심영, 진훈(강홍식), 주인규가 조선, 일본, 만주로 유랑하는 조선인 노동자들로 출연했다. 도와상사는 고려영화협회와의 협력 관계 속에서 <복지만리>의 일본 배급을 기획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40년대 · 복지만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71_04
복지만리Stills
영화 <복지만리>(전창근, 1941)의 장면 사진. 조선을 넘어 일본과 만주까지 시장을 확장하고자 했던 고려영화협회의 대작 프로젝트였던 <복지만리>는 만주영화협회와 합작한 ‘선만(鮮滿)영화의 첫 악수’로 홍보되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또 만주로 떠도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그려, 만주 이주 정책 등의 시국에 부합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시나리오 집필에서 개봉까지 2년 5개월이 걸렸고, 총 제작비 10만 원이 투여되었으며, 조선, 일본, 만주를 배경으로 한 로케이션 촬영과 최초의 크레인 촬영을 시도했다. 심영, 진훈(강홍식), 주인규가 조선, 일본, 만주로 유랑하는 조선인 노동자들로 출연했다. 도와상사는 고려영화협회와의 협력 관계 속에서 <복지만리>의 일본 배급을 기획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40년대 · 복지만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72_05
복지만리Stills
영화 <복지만리>(전창근, 1941)의 장면 사진. 조선을 넘어 일본과 만주까지 시장을 확장하고자 했던 고려영화협회의 대작 프로젝트였던 <복지만리>는 만주영화협회와 합작한 ‘선만(鮮滿)영화의 첫 악수’로 홍보되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또 만주로 떠도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그려, 만주 이주 정책 등의 시국에 부합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시나리오 집필에서 개봉까지 2년 5개월이 걸렸고, 총 제작비 10만 원이 투여되었으며, 조선, 일본, 만주를 배경으로 한 로케이션 촬영과 최초의 크레인 촬영을 시도했다. 심영, 진훈(강홍식), 주인규가 조선, 일본, 만주로 유랑하는 조선인 노동자들로 출연했다. 도와상사는 고려영화협회와의 협력 관계 속에서 <복지만리>의 일본 배급을 기획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40년대 · 복지만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301479_03
집없는 천사Stills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장면 사진. 현재 확인 가능한 필름에는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다.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58_04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거리의 아이들과 방 원장(김일해 분).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59_04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새로운 향린원으로 이사 후, 아이들이 간판을 세우는 모습이다. 간판에는 "향린원 소년료"라고 적혀있다.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0_04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향린원 소년들의 숙소. 사진 우측 하단에 '고려영화협회'의 마크가 있다.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1_05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2_05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3_05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4_04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5_05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6_04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7_05
집없는 천사Stills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의 한 장면. 도와상사가 일본 배급을 추진했지만, 문부성 추천이 유명무실해져 일본 개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흥행이 부진했으며, 교토, 아이치, 후쿠오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영화순보》 제33호, 1941.12.1 참조.
1940년대 · 집없는 천사 · 장면 사진 · 고려영화협회
DSKT014668_05
김소영Stills
193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에 소개된 조선영화들은 단순한 문화적 교류를 넘어, 조선을 이국적 타자로 전시하는 제국주의적 시선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예봉, 김소영, 김신재는 일본 영화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들'로 소개되며 '조선영화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김소영은 최인규 감독의 <국경>(1939)을 통해 일본에 알려졌는데, ‘조선에서 가장 유망한 배우’(朝鮮映の現を語る-座談報告, 日本映畵, 1939年 8月)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인물 사진
DSHT051909_03
김신재Stills
193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에 소개된 조선영화들은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조선을 이국적 타자로 전시하는 제국주의적 시선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예봉, 김소영, 김신재는 일본 영화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들'로 소개되며 '조선영화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심청>(안석영, 1937)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이래 <도생록>(윤봉춘,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무정>(박기채, 1939)으로 조선에서 인지도를 넓힌 김신재는 최인규 감독의 <수업료>(최인규방한준, 1940)와 <집없는 천사>(1941)에 출연하며 더욱 주목받았다. 김신재는 다른 여배우들에 비하여 일본어가 유창한 편이었고, 특유의 명랑한 이미지로 선전영화에서 활약했다. 도와상사를 통해 <수업료>와 <집없는 천사>의 배급이 추진되었던 만큼, 이 사진은 이 영화들의 홍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물 사진
DSHT051167_04
김신재Stills
193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에 소개된 조선영화들은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조선을 이국적 타자로 전시하는 제국주의적 시선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예봉, 김소영, 김신재는 일본 영화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들'로 소개되며 '조선영화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심청>(안석영, 1937)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이래 <도생록>(윤봉춘,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무정>(박기채, 1939)으로 조선에서 인지도를 넓힌 김신재는 최인규 감독의 <수업료>(최인규방한준, 1940)와 <집없는 천사>(1941)에 출연하며 더욱 주목받았다. 김신재는 다른 여배우들에 비하여 일본어가 유창한 편이었고, 특유의 명랑한 이미지로 선전영화에서 활약했다. 도와상사를 통해 <수업료>와 <집없는 천사>의 배급이 추진되었던 만큼, 이 사진은 이 영화들의 홍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물 사진
DSHT051171_04
김신재Stills
193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에 소개된 조선영화들은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조선을 이국적 타자로 전시하는 제국주의적 시선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예봉, 김소영, 김신재는 일본 영화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들'로 소개되며 '조선영화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심청>(안석영, 1937)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이래 <도생록>(윤봉춘,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무정>(박기채, 1939)으로 조선에서 인지도를 넓힌 김신재는 최인규 감독의 <수업료>(최인규방한준, 1940)와 <집없는 천사>(1941)에 출연하며 더욱 주목받았다. 김신재는 다른 여배우들에 비하여 일본어가 유창한 편이었고, 특유의 명랑한 이미지로 선전영화에서 활약했다. 도와상사를 통해 <수업료>와 <집없는 천사>의 배급이 추진되었던 만큼, 이 사진은 이 영화들의 홍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에서 김신재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일본의 영화 잡지 《신영화(新映)》이다.
인물 사진
DSHT051905_03
김신재Stills
193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에 소개된 조선영화들은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조선을 이국적 타자로 전시하는 제국주의적 시선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예봉, 김소영, 김신재는 일본 영화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들'로 소개되며 '조선영화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심청>(안석영, 1937)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이래 <도생록>(윤봉춘,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무정>(박기채, 1939)으로 조선에서 인지도를 넓힌 김신재는 최인규 감독의 <수업료>(최인규방한준, 1940)와 <집없는 천사>(1941)에 출연하며 더욱 주목받았다. 김신재는 다른 여배우들에 비하여 일본어가 유창한 편이었고, 특유의 명랑한 이미지로 선전영화에서 활약했다. 도와상사를 통해 <수업료>와 <집없는 천사>의 배급이 추진되었던 만큼, 이 사진은 이 영화들의 홍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에서 김신재가 서 있는 벽에 부착돼 있는 것은 일본의 영화 잡지 《스타아(スタア)》의 5주년 기념 특별호(5월 상순 발간). 《스타아(スタア)》는 1933년 6월에 창간호를 발행했으므로, 1938년 5월호로 추정된다.
인물 사진
DSHT051906_03
문예봉Stills
문예봉 프로필 사진. 193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에 소개된 조선영화들은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조선을 이국적 타자로 전시하는 제국주의적 시선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예봉, 김소영, 김신재는 일본 영화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들'로 소개되며 '조선영화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문예봉은 <나그네>(이규환, 1937),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 등을 통해 일본에 알려졌다.
인물 사진
DSHT051168_04
문예봉Stills
문예봉 프로필 사진. 193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에 소개된 조선영화들은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조선을 이국적 타자로 전시하는 제국주의적 시선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예봉, 김소영, 김신재는 일본 영화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들'로 소개되며 '조선영화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문예봉은 <나그네>(이규환, 1937),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 등을 통해 일본에 알려졌다.
인물 사진
DSHT051169_04
노래조선Stills
오케레코드사의 영화제작부가 경성촬영소 기술진의 도움으로 제작한 <노래조선>(김상진, 1936)의 한 장면. 1936년 2월부터 3월까지 오케연주단의 일본 공연 영상과 국내에서 촬영한 '코믹 춘향전'을 편집한 것으로, '조선 최초의 음악영화'이다. 고복수, 이난영, 김해송 등 오케레코드사 전속 가수들이 출연하고 오케째즈밴드가 연주했다.
1930년대 · 노래조선 · 장면 사진 · OK레코드
DSKT014620_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