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Stillscopies: 2
황철(1912~1961)은 1935년 동양극장 전속극단인 청춘좌의 창단 단원이자, 1939년 극단 아랑을 창설하며 대표를 역임했다(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참조). 황철은 동양극장의 최상덕과 고려영화협회의 이창용이 경성촬영소를 인수해 기획한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명우, 1939)에 출연했는데(한국영상자료원 엮음, 『고려영화협회와 영화 신체제 1936~1941』, 2007), 이 무렵 니시키 모토사다는 고려영화협회 문학부 소속이었다(김려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삼인, 2006, 223쪽). 이후 황철은 <젊은 모습>(도요다 시로, 1943)에서 마쓰다 교관을 연기했다. 이 역할에 대해 『경성일보』는 "극중 스키 조난 장면부터 출연하기 위해" 로케 현장으로 떠났다고 보도했다(『경성일보』 1943. 4. 2). 또한 이 기사는 황철을 "아는 사람은 아는 반도 연극계의 중심인물"로서, "영화에는 <그대와 나>(허영, 1941)에도 출연했지만 본격적으로 주역을 맡은 것인 이번이 처음"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사진 왼쪽 하단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로고가 압인돼 있으며, 사진의 뒷면에는 '경성보도사진공예사'의 도장이 찍혀 있다.
배우 · 초상 · 경성보도사진공예사 촬영 · 온라인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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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철Stillscopies: 2
황철(1912~1961)은 1935년 동양극장 전속극단인 청춘좌의 창단 단원이자, 1939년 극단 아랑을 창설하며 대표를 역임했다(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참조). 황철은 동양극장의 최상덕과 고려영화협회의 이창용이 경성촬영소를 인수해 기획한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명우, 1939)에 출연했는데(한국영상자료원 엮음, 『고려영화협회와 영화 신체제 1936~1941』, 2007), 이 무렵 니시키 모토사다는 고려영화협회 문학부 소속이었다(김려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삼인, 2006, 223쪽). 이후 황철은 <젊은 모습>(도요다 시로, 1943)에서 마쓰다 교관을 연기했다. 이 역할에 대해 『경성일보』는 "극중 스키 조난 장면부터 출연하기 위해" 로케 현장으로 떠났다고 보도했다(『경성일보』 1943. 4. 2). 또한 이 기사는 황철을 "아는 사람은 아는 반도 연극계의 중심인물"로서, "영화에는 <그대와 나>(허영, 1941)에도 출연했지만 본격적으로 주역을 맡은 것인 이번이 처음"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사진 오른쪽 하단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로고가 압인돼 있으며, 사진의 뒷면에는 '경성보도사진공예사'의 도장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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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철Stillscopies: 2
황철(1912~1961)은 1935년 동양극장 전속극단인 청춘좌의 창단 단원이자, 1939년 극단 아랑을 창설하며 대표를 역임했다(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참조). 황철은 동양극장의 최상덕과 고려영화협회의 이창용이 경성촬영소를 인수해 기획한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명우, 1939)에 출연했는데(한국영상자료원 엮음, 『고려영화협회와 영화 신체제 1936~1941』, 2007), 이 무렵 니시키 모토사다는 고려영화협회 문학부 소속이었다(김려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삼인, 2006, 223쪽). 이후 황철은 <젊은 모습>(도요다 시로, 1943)에서 마쓰다 교관을 연기했다. 이 역할에 대해 『경성일보』는 "극중 스키 조난 장면부터 출연하기 위해" 로케 현장으로 떠났다고 보도했다(『경성일보』 1943. 4. 2). 또한 이 기사는 황철을 "아는 사람은 아는 반도 연극계의 중심인물"로서, "영화에는 <그대와 나>(허영, 1941)에도 출연했지만 본격적으로 주역을 맡은 것인 이번이 처음"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사진 오른쪽 하단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로고가 압인돼 있으며, 사진의 뒷면에는 '경성보도사진공예사'의 도장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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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모요시Stillscopies: 2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는 한국에서 극단 신쿄의 연출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출발점은 화가였다. 1922년 베를린에 유학하기도 하여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전위 예술가로도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연극 운동에 참여했고 1930년대 극단 신쿄에서 연출과 각본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가부키를 연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40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됐고, 1944년에 보석으로 석방된 이후에는 만주와 조선을 여행하다 1945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경성일보』 1938년 10월 9일자 4면에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 일본 신쿄극단 극작가), 니키 도쿠진(仁木獨人, 일본 신쿄극단 매니저)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이 지면에는 "고향으로 돌아온 춘향전"이라는 제목의 아키타 우자쿠의 글과 "신협극단 춘향전 공연에 부쳐"라는 제목의 기사 등, <춘향전> 공연에 거는 각계 각계 각층의 기대가 실려 있다. 또한 <춘향전> 경성 부민관 공연 광고 역시 같은 면에 실려 있다. 사진 위의 청회색 칠은 신문에 싣기 위해 인물 주변의 배경을 지운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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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모요시Stillscopies: 2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는 1938년에 세 번 경성을 방문했는데, 이 사진은 그해 2월, 신쿄극단의 <춘향전> 도쿄 공연에 의상 협찬을 위해 처음으로 경성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무라야마는 시간이 없어 비행기로 이동했는데, 유치진, 박기채를 비롯해 조선영화주식회사(이하 '조영') 관계자들이 경성역으로 마중을 나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モダン日本 朝鮮版 1940』, モダン日本社,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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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모요시Stillscopies: 2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는 1938년에 세 번 경성을 방문했는데, 이 사진은 그해 2월, 신쿄극단의 <춘향전> 도쿄 공연에 의상 협찬을 위해 처음으로 경성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무라야마는 시간이 없어 비행기로 이동했는데, 유치진, 박기채를 비롯해 조선영화주식회사(이하 '조영') 관계자들이 경성역으로 마중을 나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モダン日本 朝鮮版 1940』, モダン日本社,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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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모요시Stillscopies: 2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는 1938년에 세 번 경성을 방문했는데, 이 사진은 그해 2월, 신쿄극단의 <춘향전> 도쿄 공연에 의상 협찬을 위해 처음으로 경성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무라야마는 시간이 없어 비행기로 이동했는데, 유치진, 박기채를 비롯해 조선영화주식회사(이하 '조영') 관계자들이 경성역으로 마중을 나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モダン日本 朝鮮版 1940』, モダン日本社, 1940). 사진 속 무라야마 도모요시 옆에 있는 사람이 극작가 유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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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모요시Stillscopies: 2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는 1938년에 세 번 경성을 방문했는데, 이 사진은 그해 2월, 신쿄극단의 <춘향전> 도쿄 공연에 의상 협찬을 위해 처음으로 경성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무라야마는 시간이 없어 비행기로 이동했는데, 유치진, 박기채를 비롯해 조선영화주식회사(이하 '조영') 관계자들이 경성역으로 마중을 나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モダン日本 朝鮮版 1940』, モダン日本社, 1940). 사진 속 무라야마 도모요시 옆에 있는 사람이 극작가 유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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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키 유리코 기증 인물미상Stillscopies: 2
사진의 제일 오른쪽 인물은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로 추정되나, 더 이상의 정보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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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 쇼지로Stillscopies: 2
구보타 쇼지로(久保田正二郞)는 극단 신쿄에서 주로 무대 효과를 담당했다. 그가 언제부터 극단 신쿄에서 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37년 실시된 제5회 "빛나는 극단상(輝く劇賞)"을 받는 등, 무대 뒤 주요 스태프 중 한 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제10회 시상은 <춘향전>과 관련이 있었는데, 수상자는 극 중 몽룡을 연기한 아카기 란코(赤木蘭子)와 연출을 보조했던 안영일이었다(『新協五周年史』, 1939). 재일조선인 문학 연구가 하야시 코지(林浩治)에 따르면, 극단 신협에 있던 조선인은 무대 감독 및 연출 조수였던 안영일, 선전부의 허달(허훈 혹은 조우적으로도 불린다), 그리고 효과 담당이었던 구보타 쇼지로였다고 한다(林浩治, 「村山知義の朝鮮行についてなど」, 『新日本文』 652호, 1995년 6월호, 55쪽). 구보타의 조선 이름은 이강복이다. 1940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됐던 단원 중 한 명인 하라 센코(原泉子)는 같은 세타카야 유치장에서 취조를 받고 나서야 구보타가 조선인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춘향전>의 조선 공연에서는 허달과 함께 손님 역할을 맡아 무대 위에 올랐다. 허달은 카프 도쿄 지부와 삼일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는데, 해방 후 북한으로 건너가 국립영화촬영소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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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노 미치코Stillscopies: 2
구와노 미치코(桑野通子, 1915~1946)는 시미즈 히로시의 〈아리가토상有難うさん〉(1936)에 출연하여 이름을 알렸다. 이후 조선철도국이 일본의 쇼치쿠에 의뢰해 만든 <사계의 조선 四季の朝鮮>(1939、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에 출연했는데, 이 당시에 조선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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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란Stillscopies: 2
만주영화협회(이하 '만영')의 스타 이향란(李香蘭, 본명: 야마구치 요시코 山口淑子, 1920~2014)이 경성에 왔을 때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이향란은 조선에 세 번 방문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첫 번째 방문은 1940년 7월로, 도쿄 가부키자 공연을 위해 일본으로 가던 중에 경성을 경유했다. 그녀가 묵었던 반도호텔로 영화인들과 기자들이 운집했고,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여배우 문예봉과 김신재가 이향란과 짧은 좌담회를 가졌다. 이향란과 문예봉, 김신재의 좌담회는 『삼천리』 1940년 9월호에 실렸다. 이향란의 두 번째 조선 방문은 1941년 3월 초순으로, 만영영화 <철혈지심 血慧心>(1939, 일본 개봉 제명: 아름다운 희생 美しき牲)의 프로모션을 위해 고려영화협회가 초청하여 방문한 일이다. 이향란은 이때 부산, 대구, 경성, 원산, 함흥, 평양, 진남포 등 전국 대도시를 돌며 어트랙션 공연을 했다. 마지막 세 번째 방문은 <병정님>(방한준, 1944) 촬영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향란 옆에서 한복을 입고 있는 여성은 쇼치쿠 소속 배우 구와노 미치코(桑野通子, 1915~1946)인데, 구와노 미치코는 쇼치쿠가 조선철도국의 의뢰로 제작한 <사계의 조선 四季の朝鮮>(1939、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이라는 영화에 특별출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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