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 대책위원회 결성Stills
1993년, 문화체육부의 스크린쿼터 40일 축소 결정에 반대하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출범했다. 비대위는 10월 22일, 서울 중구 필동에 위치한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실에서 대표자회의를 가졌으며, 최금동, 유현목, 이태원, 임권택, 유동훈 5인이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한 대응행동으로 10월 27일 영화의날 기념행사 취소 및 이날 하루 모든 영화 제작 활동 중단을 결정했으며("스크린쿼터 사수 비대위 출범, 《경향신문》, 1993.10.24., 17면), 같은 날 영화인 500여 명이 참석한 "의무상영일수 축소 규탄대회"를 열었다(「19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백서」, 스크린쿼터감시단, 1994.3.10., 1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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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679012_01
한국영화 개혁을 위한 영화청년 결의문!Other material
이 문서를 공동 작성한 '영화마당 우리'는 1984년 3월, 김기종, 낭희섭, 정성헌 주도로, 프랑스문화원 씨네클럽에서 활동하던 외국어대 문명희, 성균관대 한정석 등 5명이 발기인으로 참여, 주로 대학교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단체이다. (성하훈, "한국영화 40년(6) 작은영화 운동의 중심에 섰던 영화마당 우리와 영화공간 1895", 《오마이뉴스》, 2020.02.25. 참조) '영화마당 우리'를 비롯해 '전국영화학과연합' 및 '대학영화연합'이 공동으로 작성한 이 결의문에는 공윤 해체 및 영화심의 자율 시행, 외국영화 수입개방 철회 및 스크린쿼터제 확대, 영진공 해체 및 민간 진흥기구 발족, 8mm·16mm영화 상영 보장 및 청년영화인 지원 제도 등의 주장이 담겨있는데, 이는 당시 '영투위(미국영화 직배저지·영화진흥법 쟁취 영화인투쟁위원회)'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직배 저지 및 영화진흥법 쟁취 투쟁에 대학생들이 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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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ZZ0001353_01
현행 영화 관계악법을 즉각 개정하라!Other material
이 문서를 작성한 '영화법 개정을 위한 청년영화인 협의회'는 영화법 개정 투쟁 과정에서 영화계 기득권층의 태도에 실망해 청년영화인들 주축으로 결성된 단체로, 이후 '청년영화인협의회'로 발전해 UIP 직배 저지 및 영화진흥법 제정 운동 등을 펼쳤다. 한편 청년영화인협의회(대표 정병각)는 1988년 12월 17일, 민족영화위원회(위원장 이장호, 부위원장 정지영) 창립과 함께 해체, 민족영화위원회 각 소위로 흡수되었다. ("민족영화위원회 창립", 《한겨레신문》, 1988.12.20., 12면; "저질 상업성·예속서 벗어나자", 《매일경제》, 1988.10.29., 13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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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ZZ0001354_01
한국영화 압살하는 미국영화 몰아내자!!Other material
문서 상에는 문서 작성 주체가 명시돼 있지 않으나,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 선언문」(관리번호 DZZ0001357_01)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문서는 '청년영화인협의회'가 작성한 것으로 추청된다. 청년영화인협의회(대표 정병각)는 1988년 8월 결성(추정)한 '영화법 개정을 위한 청년영화인 협의회'에서 시작해 1988년 12월 17일, 민족영화위원회(위원장 이장호, 부위원장 정지영) 창립과 함께 해체, 민족영화위원회 각 소위로 흡수되었다. ("민족영화위원회 창립", 《한겨레신문》, 1988.12.20., 12면; "저질 상업성·예속서 벗어나자", 《매일경제》, 1988.10.29., 13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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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ZZ0001355_01
영화법 개정에 관한 청년영화인의 입장과 시안 골격Other material
자료의 앞부분에는 영화진흥법 시안이 전체 6장과 부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성명되어 있으나, 실제 기증된 문서는 "제5장: 영화의 상영" 부분까지만 정리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뒷부분의 내용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 정리된 청년영화인협의회의 영화진흥법 시안 골격은 영투위가 1988년 10월에 발표한 영화진흥법 시안에 대체로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이로 미루어 이 문서는 청년영화인협의회가 결성된 1988년 8월 이후부터 영투위가 영화진흥법 시안을 발표한 1988년 10월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투위의 영화진흥법 시안 전문은 《우리영화》 창간호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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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ZZ0001356_01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 선언문Other material
1988년 9월 21일 발족한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위원장 조문진, 약칭 영투위)가 9월 23일 개최한 기자회견 시 발표한 입장문이다. 이 문서를 작성한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는 1988년 9월 21일, 영화인협회 산하 감독위원회와 청년영화인협의회가 공동으로 발기한 단체로, 발족 직후인 9월 하순(9월 28일 추정)부터는 '미국영화 직배저지·영화진흥법 쟁취 영화인투쟁위원회'(위원장 및 약칭 동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88 문화결산 민족주의 거센물결(3) 미국영화 직접배급 파문", 《한겨레신문》, 1988.12.17., 7면 참조) 한편 영협 산하 감독위원회의 일부는 1988년 11월 30일, 영협을 탈퇴하고 '한국영화감독협회(회장 권영순)를 결성하였으며, 청년영화인협의회는 1988년 12월 17일, 민족영화위원회 창립과 함께 해체, 각 소위로 흡수되었는데, 이후 1989년 2월 20일, 한국영화감독협회와 민족영화위원회는 이전의 '영투위'를 재조직화하여 '미국영화 직배저지·영화진흥법 쟁취·영화계민주화 영화인운동본부'(김정현, 이장호, 홍기선 공동대표, 약칭 '영화인운동본부')를 공동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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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ZZ0001357_01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 대책위원회 결성Stills
1993년, 문화체육부의 스크린쿼터 40일 축소 결정에 반대하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출범했다. 비대위는 10월 22일, 서울 중구 필동에 위치한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실에서 대표자회의를 가졌으며, 최금동, 유현목, 이태원, 임권택, 유동훈 5인이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한 대응행동으로 10월 27일 영화의날 기념행사 취소 및 이날 하루 모든 영화 제작 활동 중단을 결정했으며("스크린쿼터 사수 비대위 출범, 《경향신문》, 1993.10.24., 17면), 같은 날 영화인 500여 명이 참석한 "의무상영일수 축소 규탄대회"를 열었다(「19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백서」, 스크린쿼터감시단, 1994.3.10., 13쪽 참조).
2기(김영삼 정부) · 스크린쿼터사수(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 온라인 열람
DST679013_01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 대책위원회 결성Stills
1993년, 문화체육부의 스크린쿼터 40일 축소 결정에 반대하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출범했다. 비대위는 10월 22일, 서울 중구 필동에 위치한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실에서 대표자회의를 가졌으며, 최금동, 유현목, 이태원, 임권택, 유동훈 5인이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한 대응행동으로 10월 27일 영화의날 기념행사 취소 및 이날 하루 모든 영화 제작 활동 중단을 결정했으며("스크린쿼터 사수 비대위 출범, 《경향신문》, 1993.10.24., 17면), 같은 날 영화인 500여 명이 참석한 "의무상영일수 축소 규탄대회"를 열었다(「19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백서」, 스크린쿼터감시단, 1994.3.10., 1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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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679014_01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 대책위원회 결성Stills
1993년, 문화체육부의 스크린쿼터 40일 축소 결정에 반대하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출범했다. 비대위는 10월 22일, 서울 중구 필동에 위치한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실에서 대표자회의를 가졌으며, 최금동, 유현목, 이태원, 임권택, 유동훈 5인이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한 대응행동으로 10월 27일 영화의날 기념행사 취소 및 이날 하루 모든 영화 제작 활동 중단을 결정했으며("스크린쿼터 사수 비대위 출범, 《경향신문》, 1993.10.24., 17면), 같은 날 영화인 500여 명이 참석한 "의무상영일수 축소 규탄대회"를 열었다(「19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백서」, 스크린쿼터감시단, 1994.3.10., 1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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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679015_01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 대책위원회 결성Stills
1993년, 문화체육부의 스크린쿼터 40일 축소 결정에 반대하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출범했다. 비대위는 10월 22일, 서울 중구 필동에 위치한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실에서 대표자회의를 가졌으며, 최금동, 유현목, 이태원, 임권택, 유동훈 5인이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한 대응행동으로 10월 27일 영화의날 기념행사 취소 및 이날 하루 모든 영화 제작 활동 중단을 결정했으며("스크린쿼터 사수 비대위 출범, 《경향신문》, 1993.10.24., 17면), 같은 날 영화인 500여 명이 참석한 "의무상영일수 축소 규탄대회"를 열었다(「19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백서」, 스크린쿼터감시단, 1994.3.10., 13쪽 참조).
2기(김영삼 정부) · 스크린쿼터사수(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 온라인 열람
DST679016_01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 대책위원회 결성Stills
1993년, 문화체육부의 스크린쿼터 40일 축소 결정에 반대하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출범했다. 비대위는 10월 22일, 서울 중구 필동에 위치한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실에서 대표자회의를 가졌으며, 최금동, 유현목, 이태원, 임권택, 유동훈 5인이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한 대응행동으로 10월 27일 영화의날 기념행사 취소 및 이날 하루 모든 영화 제작 활동 중단을 결정했으며("스크린쿼터 사수 비대위 출범, 《경향신문》, 1993.10.24., 17면), 같은 날 영화인 500여 명이 참석한 "의무상영일수 축소 규탄대회"를 열었다(「19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백서」, 스크린쿼터감시단, 1994.3.10., 13쪽 참조).
2기(김영삼 정부) · 스크린쿼터사수(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 온라인 열람
DST679017_01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 대책위원회 결성Stills
1993년, 문화체육부의 스크린쿼터 40일 축소 결정에 반대하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출범했다. 비대위는 10월 22일, 서울 중구 필동에 위치한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실에서 대표자회의를 가졌으며, 최금동, 유현목, 이태원, 임권택, 유동훈 5인이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한 대응행동으로 10월 27일 영화의날 기념행사 취소 및 이날 하루 모든 영화 제작 활동 중단을 결정했으며("스크린쿼터 사수 비대위 출범, 《경향신문》, 1993.10.24., 17면), 같은 날 영화인 500여 명이 참석한 "의무상영일수 축소 규탄대회"를 열었다(「19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백서」, 스크린쿼터감시단, 1994.3.10., 13쪽 참조).
2기(김영삼 정부) · 스크린쿼터사수(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 온라인 열람
DST679018_01
미국영화 직배상영은 반드시 저지되어야 합니다!Other material
1988년 9월 21일 발족한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위원장 조문진, 약칭 영투위)가 9월 23일 개최한 기자회견 시 발표한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 선언문」(관리번호 DZZ0001357_01)과 함께 배포된 것으로 보이는 대국민 호소문. 이 문서를 작성한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는 1988년 9월 21일, 영화인협회 산하 감독위원회와 청년영화인협의회가 공동으로 발기한 단체로, 발족 직후인 9월 하순(9월 28일 추정)부터는 '미국영화 직배저지·영화진흥법 쟁취 영화인투쟁위원회'(위원장 및 약칭 동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88 문화결산 민족주의 거센물결(3) 미국영화 직접배급 파문", 《한겨레신문》, 1988.12.17., 7면 참조) 한편 영협 산하 감독위원회의 일부는 1988년 11월 30일, 영협을 탈퇴하고 '한국영화감독협회(회장 권영순)를 결성하였으며, 청년영화인협의회는 1988년 12월 17일, 민족영화위원회 창립과 함께 해체, 각 소위로 흡수되었는데, 이후 1989년 2월 20일, 한국영화감독협회와 민족영화위원회는 이전의 '영투위'를 재조직화하여 '미국영화 직배저지·영화진흥법 쟁취·영화계민주화 영화인운동본부'(김정현, 이장호, 홍기선 공동대표, 약칭 '영화인운동본부')를 공동 결성했다.
1기(제5~6공화국) ·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영화인운동본부 · 온라인 열람
DZZ0001358_01
영화시장 개방 저지하고 영화진흥법 쟁취하자!Other material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는 1988년 9월 21일 결성 이후, 9월 23일 기자회견을 통해 선언문(관리번호 DZZ0001357_01) 및 대국민 호소문(관리번호 DZZ0001358_01)를 발표하는 한편, 9월 24일부터 서울 명동 코리아극장과 신촌 신영극장 앞에서 직배 저지 농성에 돌입했으며, 9월 28일에는 2차 기자회견을 통해 이 문서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단체명을 '미국영화 직배저지·영화진흥법 쟁취 영화인투쟁위원회'로 바꾸는 한편, 신영극장 점거 농성을 단행했다. 이날의 시위로, 농성 참가자 62인 전원이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조문진 위원장 등 7인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한편 《한겨레신문》은 "이날의 농성장에는 제작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며, 이에 대해 "제작자와 감독의 밀월시대는 미국영화 직배 앞의 우연이었다. 앞으로 우리들은 제작자들을 향해서도 권리를 주장하게 될 것"이라는 조문진 위원장의 말을 전했다. ("'좋은 우리 영화 만들기' 선언, 《한겨레신문》, 1988.09.30., 7면) 영투위 결성 이후 1988년 10월 4일까지의 보다 자세한 투쟁 경과는 영투위가 발행한 소식지 《우리영화》 창간호(1988.10.08.)를 참조할 것.
1기(제5~6공화국) ·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영화인운동본부 · 온라인 열람
DZZ0001360_01
미국영화 직배는 신판 아편전쟁입니다Other material
미국영화 직배저지·영화진흥법쟁취 영화인투쟁위원회(영투위)는 1988년 9월 27일부터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진흥법 쟁취를 위한 국민서명운동"을 진행했는데, 이때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배포한 서명지로 보인다. 이 자료에는 날짜가 1988년 9월 28일로 적혀있다. 특히 서명지 앞면에는 미국영화 직배 허용의 배경과 그 폐단 등이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돼 있다.
1기(제5~6공화국) ·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영화인운동본부 · 온라인 열람
DZZ0001361_01
우리나라 영화인들의 미국영화 직배저지 투쟁을 적극 지원한다!Other material
1기(제5~6공화국) ·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영화인운동본부 · 온라인 열람
DZZ0001359_01
현 정권과 미국영화자본과의 '위험한 정사'를 규탄한다Other material
1988년 9월 28일, 영투위의 신촌 신영극장 앞 직배 저지 농성에 참여한 영화인들에 대한 강제 연행에 반대하며 민중문화운동연합 등 전국 18개 문화예술단체가 발표한 영투위 지지 성명서. 한편 영투위는 신영극장을 검거한 후 2차 기자회견을 통해 영투위 결정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문서제목: 영화시장 개방 저지하고 영화진흥법 쟁취하자!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진흥법 쟁취 영화인투쟁위원회를 결정하며 / 관리번호 DZZ0001360_01)
1기(제5~6공화국) ·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영화인운동본부 · 온라인 열람
DZZ0001362_01
영투위 성명서Other material
영투위는 9월 24일부터 서울 명동 코리아극장과 신촌 신영극장 앞에서 진행된 미국영화 직배 저지 시위를 결산하는 한편, 이 문서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10월 4일, UIP 사무실 앞(서울 장충동)에서 '미국영화 직접 배급회사 UIP 추방을 위한 범국민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영투위 결성 이후 1988년 10월 4일 범국민 규탄대회까지의 보다 자세한 투쟁 경과는 영투위가 발행한 소식지 《우리영화》 창간호(1988.10.08.)를 참조할 것.
1기(제5~6공화국) ·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영화인운동본부 · 온라인 열람
DZZ0001363_01
UIP 추방을 위한 범국민 규탄대회 투쟁 구호 및 가사 유인물Other material
1988년 10월 4일, UIP 사무실 앞(서울 장충동)에서 개최된 "미국영화 직접 배급 회사 UIP 추방을 위한 범국민 규탄대회"에서 배포된 것으로 보이는 투쟁 구호 및 가사 유인물. 마지막 쪽 하단부에는 규탄대회 이후 2차 집결지(예총회관/영화인협회 사무실)의 약도가 그려져 있는데, 영투위가 발간한 소식지 《우리영화》 창간호(1988년 10월 8일 발행)에 따르면, "자주적·민주적 '영협재건'을 위해" 2차 집결지인 영협 사무실을 점거, 농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1기(제5~6공화국) · 직배저지 영화인투쟁위원회/영화인운동본부 · 온라인 열람
DZZ0001364_01
노래로 태양을 쏘다(DVD)Video
<노래로 태양을 쏘다-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의 기록>은 1999년, 스크린쿼터 감시단과 서울영상집단이 제작하고,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가 제작 후원한 작품으로, 1998년 7월부터 1999년 6월까지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가 완성된 후, 부산국제영화제(1999) 와이드앵글 부문에서 상영되었으며, 2000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싱가폴국제영화제, 하와이국제영화제 등에 출품되었다. 특히 이 영화가 상영된 1999년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여러 행사들이 기획, 개최된 바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상암) 내에서 VOD로도 열람 가능하다.
3기(김대중 정부) · 스크린쿼터감시단(문화연대)
DAD000086
위험한 정사, vol 2004(DVD)Video
스크린쿼터 문화연대가 기획하고 영화진흥위원회,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원회가 제작 지원한 작품으로, 한국 정부에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숨은 의도를 파헤치고 있는 작품이다. 미국이 세계영화 시장을 급속도로 점유하기 시작한 역사적 배경을 비롯, 1988년 시작된 한국의 영화시장 개방과 이후 전개된 미국의 스크린쿼터 폐지 압력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미국 및 한국 정부 관료들과 어떻게 결탁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영화와 스크린쿼터 제도가 희생양이 되고 있는 현실을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개봉 예정 소식을 전하는 2004년 12월의 한 언론 기사("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다큐, 내년 1월 개봉", 《스타뉴스》, 2004.12.29.)는 이 작품의 워킹타이틀은 <섭씨 611>이었으나,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 제목을 모방한다는 지적이 있어 "좀 충격적인 제목"을 고민 중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워킹타이틀의 '611'은 이창동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영화인 대책위에 전달한 2003년 6월 11일을 의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창동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정책위원장을 맡은 바 있었으며, 2003년 장관 임명 초기부터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6월 11일에 영화인 대책위와의 면담에서 "한국영화 산업의 미래를 위해 스크린쿼터 축소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이 발언의 날짜가 스크린쿼터 축소 음모를 풍자적으로 그리는 영화의 제목으로 거론된 것으로 미루어, 이창동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영화인들에게 상당히 큰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기(노무현 정부 이후) · 스크린쿼터감시단(문화연대)
DAD001629_01
146-73=스크린쿼터+한미FTA(DVCAM)Video
2006년,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대책위원회와 한미 FTA 저지 독립영화 실천단이 공동 기획한 작품으로, 2006년 한미FTA 체결을 위한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 발표(1월)로 촉발된 영화인대책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는 영화인들의 릴레이 철야 농성과 영화배우들의 광화문 1인 시위, 광화문 촛불문화제와 영화인 삭발 투쟁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제도는 기존 「영화진흥법」이 폐지되고 제정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2006.4.28. 제정)에 의해 보장되되,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2006.10.29. 시행)에 의해 연간 상영일수의 1/5(=73일) 이상으로 축소되었다.
4기(노무현 정부 이후) · 스크린쿼터사수(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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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3=스크린쿼터+한미FTA(VHS)Video
2006년,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대책위원회와 한미 FTA 저지 독립영화 실천단이 공동 기획한 작품으로, 2006년 한미FTA 체결을 위한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 발표로 촉발된 영화인대책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2006년 2월, 영화인들의 릴레이 철야 농성과 영화배우들의 광화문 1인 시위, 광화문 촛불문화제와 영화인 삭발 투쟁 등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006년 3월, 영화진흥법 시행령 일부 개정 및 7월 시행으로 한국영화 의무 일수는 73일(감경 조항 삭제)로 축소되었다.
4기(노무현 정부 이후) · 스크린쿼터사수(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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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관련 영화인 대책 기자회견Video
2004년 12월 28일 영화진흥위원회 시사실에서 개최된 "스크린쿼터 관련 영화인 대책 기자회견"(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 주최) 현장이 기록돼 있다.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는 33개 영화계 모든 단체를 망라해 2003년 7월 2일 출범한 단체로, 출범 당시 임권택과 이태원이 공동대표를, 정지영과 안성기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날의 기자회견은 2004년 12월, 정부가 스크린쿼터 일수를 86~90일 축소할 예정이라는 언론보도가 전해짐에 따라 열린 것으로,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경과를 발표하는 한편, 이들과 뜻을 같이 하는 영화진흥위원회 8인의 위원들이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4기(노무현 정부 이후) · 스크린쿼터사수(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TA6000534_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