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목록 (공공데이터포털)
컬렉션명과 설명은 자료원이 제공한 한국어 원문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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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Libraries (Local ID: USMC-102693) / 1950년 10월 8일 미 제1해병사단이 촬영한 영상으로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건물과 사람들의 일상, 인천 월미도에서 북한인민군 포로들의 행렬, 맥아더와 이승만 등이 서울시청에서 만나는 장면, 미 제1해병사단이 인천에 개설한 임시묘지 개장식 등을 기록하고 있다. 영상이 촬영된 시기는 10월 1일 38선 돌파 이후 10월 8일 원산-함흥 작전을 개시한 날이다. 미 제1해병사단은 1950년 9월 15일부터 월미도와 인천항에 상륙한 뒤 9월 28일 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미 해병대는 북한인민군 포로 약 300명을 월미도 포로집결소에서 인천 제1임시포로수용소(인천소년형무소)로 이송했다. 미군 임시묘지는 대전 미군1묘지, 서울 관악·대구의 제1기병사단 묘지, 금천의 제25사단묘지, 부산의 유엔묘지, 마산의 제25사단묘지, 인천 제1해병사단묘지 등이 있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인천 제1해병사단묘지에는 864명의 미 해병대 병사를 매장했다. 1951년 1.4후퇴 때에는 모두 부산 남구 당곡 유엔묘지로 이송되었다. 영상의 전반부에 보이는 심하게 파손된 서울 시내 건물들의 모습은 서울 수복 이전의 공중폭격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50년 8월 3일 마포와 용산 일대 B-26 폭격기들은 주간 26회와 야간 8회를 포함해 총 34회의 폭격을 실시했다. 4일 5공군의 B-29들이 서울 용산 일대의 삼중 교량 부근에 있는 부교, 5일 B-29 12대가 서울 지역 일대를 폭격하고 이어서 B-26 20대가 서울-인천-금천 구역에 야간폭격 실시하고, 6일 5공군 22와 92폭격단이 경폭격기 B-26을 이용해 11회에 걸쳐 야간 폭격을 실시했다. 9월 10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작전은 서울 용산뿐 아니라 인천, 수원, 청주, 군산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도시에 네이팜탄과 500파운드 폭탄을 이용해 ‘융단 폭격’이 이뤄졌다. 9월 10, 22일 두 차례 미 공군 B-29, 26은 용산과 서울역 일대를 폭격했다. 같은 해 10월 30일 서울시 전쟁피해 상황 조사 결과 소사(燒死) 1,452명(남 756, 여 696)이며, 국방부 통계에서 9월 28일 공중폭격으로 사망 842(463명, 379명), 1,587명(884명, 703명)으로 제각각이고 10월 25일 사망 7,074명, 부상자 1,153명, 행방불명 628명이다.
전쟁포로 · 포로 행렬 · 전사자 묘지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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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28680) / 한국전 당시의 후방 빨치산 포로를 촬영한 매우 사료적 가치가 높은 영상이다. 한국전쟁 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지리산 일대에서는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을 중심으로 하는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었다. 38선 부근의 전투가 만성화되자 유엔군사령부는 지리산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에 수도사단은 지리산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이 영상이 촬영된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은 이미 소개되었지만, 이 영상을 통해 당시 구례에 만들어진 수용소의 규모, 형태, 생활 및 포로들의 호송, 점검, 입소, 식사 등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포로들의 신체 상황은 매우 열악한 것으로 보인다. 영상을 기준으로 두 명이 이동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발에 동상이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포로 · 빨치산 수용소 · 빨치산(Parti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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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4331) / 1960년 8월 7~8일의 DMZ 순찰 활동을 담은 푸티지 영상이다. 1953년 7월 22일에 군사분계선의 위치와 남북 경계가 최종 합의된 지 7년이 지난 시점, 즉 1967년 비무장지대 전체에 철책과 초소가 만들어지기 전의 DMZ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53년 7월 22일 군사분계선의 위치와 남북 경계에 대한 최종 합의 이후 비무장지대의 경계 표시를 위해 최초로 설치된 것은 6피트 표지판과 표지판 좌우에 일부 건설된 두 가닥 철조망 울타리였다. 표지판은 300m를 초과하지 않는 간격으로 설치되었고 철조망의 위쪽 선과 연결되었다. 표지판에는 ‘비무장지대’라고 한글, 영어, 한문으로 병기했다. 비무장지대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이 철조망에서 약 180미터 되는 지점에 ‘경고판’을 부착했다. 하지만 표지판 주변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철조망이 설치되지는 않았다. 1955년 9월 12일에 121개의 표지판이, 1957년까지 총 1,292개가 200m 간격으로 오솔길, 강, 하천에 지뢰 매설 작업과 병행하여 설치되었다. 이 시기에 이 표지판 사이에 두 가닥 철조망 울타리가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이 영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무장지대의 경계를 표시했다. 1959년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확대, 1968년 1월 17일 파주 비무장지대를 통한 김신조 외 31명의 청와대 습격 사건(1·21사태), 1월 23일 푸에블로호 사건 등으로 1960년대의 비무장지대는 어느 때보다 군사 대립이 심화됐다. 이에 따라 비무장지대의 경계 표시는 두 가닥 철조망에서 전면적인 철책의 설치로 그 풍경이 변화했다. 1964년 한국군은 비무장지대에 목책을 설치해 북한군의 침투를 방어하고자 했는데 목책은 경계병의 시야를 방해하고 내구성이 약했다. 1965년 북한은 북방한계선을 군사분계선 가까이 설치하고 남한도 남방한계선을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북쪽으로 이동했으며, 여기에 철조망을 설치했다. 1967년 한국군은 대침투작전위원회를 구성해 남방한계선 전 구간에 철책 설치를 결정하고 파주 일대 비무장지대에 10월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되었다. 1968년에 북한은 비무장지대 안쪽으로 철조망을 설치했다.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의 철책은 미군의 원조로 이후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고 1972년까지 완료되었다. 이후 이 철책들은 다시 세워지거나 덧씌워져서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오고 있다.
판문점/DMZ · DMZ 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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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29582) / 1952년 2월 11일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대규모 수용소 체육대회를 기록한 영상이다. 육상종목뿐만 아니라 권투 등이 다양하게 펼쳐졌으나 영상에는 반쯤 허리를 굽혀 달리는 장면과 오래달리기, 권투 경기 3종목만이 나온다. 이 체육대회는 민간정보교육국(CIE)에서 실시한 재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로서, CIE의 교육부에서는 체육 활동을 ‘경기오락’이라고 지칭하고 경기오락담당관 아래 부대 교육지도자와 수용동 지도자를 두었다. 여기에는 운동경기, 미술, 연극, 음악, 문화, 예술 등의 분야가 총망라됐으며, 단순한 운동경기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반공구호와 노래가 등장했다. 이처럼 미군은 2차 세계대전부터 포로들의 재교육한 경험을 바탕으로 심문, 세뇌, 훈련센터를 설치해 한국전쟁기 북한인민군뿐만 아니라 중국인민지원군까지 ‘세뇌’라는 형태의 재교육을 기획했다. 교육의 목표는 ① 유엔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목표와 활동에 대한 포로들의 이해와 공감을 증진하고 ② 포로들이 수용소에서의 활동들을 통해 집단 내의 민주적 절차와 그 방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③ 포로들이 향후 그들의 국가 재건설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직업적 기술적 능력을 증진과 동시에 이러한 능력 증진을 통해 수용소 생활 개선이 기여하며, ④ 독립되고 통일된 한국 건설에 북한 포로들이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 이해, 태도를 기를 수 있도록 할 것이며 ⑤ 북한 포로들을 유엔의 목표와 활동에 대해 북한인들을 재교육하기 위한 핵심세포로서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교육 목표에 따라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포로 500명을 대상으로 첫 재교육의 실험이 이뤄졌고 그 결과에 따라 1951년 6월부터 연합군최고사령부(GHQ) 산하 CIE가 담당하게 되었다. CIE는 종전 직후 일본인들의 재교육을 담당한 부서이며 1951년 4월 3일부터 일반명령 8호에 따라 유엔군사령부 예하로 재편성되어 본격적인 내부 조직 확대(실행본부, 야전작전부, 교재출판부)와 한국 민간요원 등을 임명했다. 재교육은 사상재교육에서 주입식 일방적 ‘세뇌’이며 종교 및 운동, 직업교육, 라디오 교육 등 다양하게 이뤄졌다.
전쟁포로 · 거제도 포로수용소 · 수용소 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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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4652) / 이 영상은 1961년 7월 15일에 군사정전위원회 산하 공동감시소조(JOT)의 찰스 라이글(Charles Reigle) 중령 이하 유엔군 장교 및 통역, 북한 김대령 이하 장교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 등 회의장 내부를 보여주고 있다. 회의장 좌측 창문 틈으로 보이는 바깥의 기자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이 촬영된 1961년 7월의 시점에는 회장 주변이 양측에 의해 완벽하게 구획되지 않고 서로 섞여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이런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과 같이 양측에 의해 명확하게 구역이 구획되어 관리되게 된다. 1961년 3월 20일의 푸티지에는 마셜제도 콰잘레인 환초에 건설된 건물 및 부대 시설 모습이 기록됐다. 콰잘레인 환초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 전초기지였던 것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미군 기지, 군사무기 시험 등의 장소로 사용됐다.
판문점/DMZ ·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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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4918) / 이 영상은 1961년 7월 15일 군사정전위원회 산하 공동감시소조가 판문점에서 회의를 진행(해당 영상: 111-LC-44652)하기 전인 6월 28일 비무장지대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양측은 인민군이 데려온 간첩 용의자의 발언을 기록하고 압수된 소지품을 공동으로 조사한다. 판문점이 아닌 군사분계선 사이의 통로에서 만나 회의를 진행한 것이 이채롭다. 또한 당시 비무장지대의 경계가 현재의 철책 구조가 아닌 두 가닥 철조망에 의해 구획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다른 참고 영상 : 111-LC-44331)
판문점/DMZ ·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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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4919) / 1961년 6월 24일 군사정전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는 판문점과 그 주변의 여러 모습을 기록한 영상이다. 이 영상은 남·북·미군의 정전협정 위반과 충돌이 격증하기 전인 1960년대 초 판문점의 공간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평화의 파고다’(1964년 준공)와 남측의 ‘자유의 집’(1965년 준공) 등이 세위지기 전의 시기이기 때문에, 1968년에 찍은 영상(428-NPC-41096)과 비교해보면 판문점의 모습이 매우 단촐하게 보인다. 이 시기에는 판문점이 위치한 공동경비구역은 비록 제한이 있었지만,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때마다 남·북한군이 비교적 자유롭게 군사정전위원회 구역을 오고 갈 수 있었고 양측의 인사들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영상에서도 판문점 주변에 미군, 기자, 인민군, 관광객 등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판문점/DMZ ·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MK064378_P01
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7140) / 1963년 9월 17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양측 대표단 및 회의 현장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서 조지 클라우드(George Cloud) 소장과 장우주 소장 등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 및 국군 대표와 북한의 고위급 대표 사이의 회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찍혀 있다. 이날 회의에서 유엔군측은 사진을 제시하며 “1960년대 이후 유엔측이 나포, 사살한 간첩의 수가 2,000명이 넘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영상은 남·북·미군의 정전협정 위반과 충돌이 격증하기 전인 1960년대 초 판문점의 공간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평화의 파고다’(1964년 준공)와 남측의 ‘자유의 집’(1965년 준공) 등이 세위지기 전의 시기이기 때문에, 1968년에 찍은 영상(428-NPC-41096)과 비교해보면 판문점의 모습이 매우 단촐하게 보인다. 이 시기에는 판문점이 위치한 공동경비구역은 비록 제한이 있었지만,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때마다 남·북한군이 비교적 자유롭게 군사정전위원회 구역을 오고 갈 수 있었고 양측의 인사들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영상에서도 판문점 주변에 미군, 기자, 인민군, 관광객 등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판문점/DMZ ·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MK064379_P01
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7460) / 이 영상은 1963년 9월 17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유엔군 및 공산군의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장면을 촬영한 푸티지 필름이다. 이날 회의에서 유엔군측은 “1960년대 이후 유엔측이 나포, 사살한 간첩의 수가 2,000명이 넘는다”고 주장하였다. 본 영상에서 회의장 안에 양측이 보고있는 사진은 이들 중 일부의 사진인 것으로 보인다. 회의 테이블 위에 증거물로 수류탄, 소총이 올라오는 장면으로 당시 분위기를 추측할 수 있다.
판문점/DMZ ·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MK064380_P01
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7461) / 1963년 9월 17일과 18일 동안 촬영된 푸티지 영상으로서, 9월 17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장면과 유엔 각국 헌병들의 교대식, 시민 견학, 9월 17일부터 18일 양일간의 군사분계선 주변 풍경 등 다양한 장면을 담고 있는 푸티지 영상이다. 9월 17일의 회의에서 유엔군측은 “1960년대 이후 유엔측이 나포, 사살한 간첩의 수가 2,000명이 넘는다”고 주장하였다. 이 영상은 남·북·미군의 정전협정 위반과 충돌이 격증하기 전인 1960년대 초 판문점의 공간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평화의 파고다’(1964년 준공)와 남측의 ‘자유의 집’(1965년 준공) 등이 세위지기 전의 시기이기 때문에, 1968년에 찍은 영상(428-NPC-41096)과 비교해보면 판문점의 모습이 매우 단촐하게 보인다. 또한 당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판문점이라는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엔군을 구성하는 태국군, 에티오피아군, 튀르키예군 등이 미군 및 한국군과 함께 경비를 서고 있으며, 북한측 대표와 북한 경비도 보인다. 이들처럼 군사정전위원회 구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수는 없지만 단체 방문한 한국 관람객들의 모습도 담겼다. 비무장지대 내에 철책이 설치되기 전에 두 줄 철조망으로 경계가 표시되어 있는 장면도 이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판문점/DMZ ·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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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7474) / 이 영상은 1963년 9월 17일 촬영되었으며, 비무장지대에서 슈미트(Schmidt) 소위가 이끄는 제8기갑여단 제1대대 기갑기병소대(Armored Cavalry Platoon, 1st Battalion 8th Cavalry) 요원들이 군사분계선 정찰 및 수색을 진행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는 군사분계선 표지판이 두 가닥의 철조망으로 연결되어 있던 시기였는데, 이 영상에 등장하는 표지판에는 철조망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1967년부터 비무장지대에는 두 가닥 철조망 대신 철책이 전면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다.
판문점/DMZ · DMZ 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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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장처: 미국 National Archives II (Local ID: 111-LC-47482) / 1963년 9월 13일, 제8기병여단 제1대대 기갑기병소대(Armored Cavalry Platoon, 1st Battalion 8th Cavalry)가 주둔한 캠프 영(Camp Young)의 모습 및 비무장지대 순찰 장면이 담겼다. 군사분계선이 철책으로 구분되기 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의 뒷부분은 1963년 8월 20일에 열린 군사정전위원회를 둘러싼 판문점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판문점/DMZ · DMZ 순찰 · 캠프 영(Camp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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