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트 및 배우 관련 메모Other materialcopies: 2
<카인의 후예>(유현목, 1968)의 배우와 관련된 메모로, 총 2장 분량이다. 첫 번째 장은 콘티 용지 뒷면에 작성한 것으로, 해당일 오전 5시에 도착해야 하는 배우의 이름이 적혀 있다. 두 번째 장은 조연급 등장인물과 그 배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이 중 메모에 등장하는 인명과 공식 크레디트가 다른 배역은 다음과 같다. [배역: 배우명(메모, 공식 크레디트 게재 순)] 보안서원: 이동민, 최창현 / 이동민, 성소민 공작원A: 성소민 / - 공작원B: 박복남 / - 관호: 심갑종 / - 칠성아반: 추봉 / - 곱실아반: 박철 / - 미륵 형: 박시명 / 박철 또 조부: 송억 / - 갑성모: 지계순 / -
카인의 후예 · 1960년대 · 제작실무자료 · 온라인 열람
ZK0000548_01
악몽Scripts and storyboardscopies: 2
<악몽>(유현목, 1968)의 시나리오이다. 표지에는 "공보부 주최 50만원 현상 시나리오 당선작 각본 박성조 / 악몽"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공보부가 모집한 1968년도 상반기 시나리오, 방송극 수상작 중 한 편이다. 표지 하단에는 "유현목 용"이라고 적혀 있다. 표지 다음 장에는 촬영 일정(촬영날짜, 출연자, 장소 등)이 메모되어 있다. 이어서 스태프와 캐스트 목록이 등장하는데, 이 시나리오 상에는 조명 정경희, 소품 추교환, 제작주임 강무웅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하지만 영화의 공식 크레디트에는 조명 김창석, 소품 이상구, 제작주임 최재호의 이름이 올려 있다. "등장인물" 면에는 역할 역에 수기로 배우의 이름(신성일, 윤정희 박암)이 적혀 있다. 시나리오는 S#1에서 시작해 S#118로 끝을 맺는데, 실제 완성된 영화는 시나리오의 S#18부터 시작하며, 시나리오의 후반 장면들도 영화에서는 대푝 간소화되었다. 일례로 시나리오의 S#93~S#114까지는 영화에서 생략되거나 장소가 바뀌는 등, 좀 더 간략하게 전개된다. 또한 시나리오에서는 S#115 이후 독고남(신성일 분)과 강애리사(윤정희 분)가 남한 귀순에 성공한 후 애리사는 연인 안철을 만나고 독고남은 남한 방송국과 인터뷰를 하는 장면 등이 등장하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귀순 전 독고남이 죽고 애리사만 남한으로 향하는 장면을 롱 숏으로 보여주며 끝난다. 시나리오 곳곳에 수정된 대사나 지문, 추가된 장면 등이 쓰여 있다. 때로 카메라 포지션이 그려져 있거나 대사에 줄을 긋고 컷을 구분해 번호를 매겨 놓은 줄콘티의 흔적도 눈에 띈다. 시나리오 제일 뒷부분에는 부록으로 "1968년 4월 전화번호부"가 인쇄되어 있다.
악몽 · 1960년대 · 시나리오
CKO003466_01
악몽Scripts and storyboardscopies: 2
<악몽>(유현목, 1968)의 S#95 C#1 콘티이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이나, 「<악몽>(1968) 시나리오 (유현목 용)」(관리번호 CKO003466_01)의 S#95와는 다르다.
악몽 · 1960년대 · 콘티 · 온라인 열람
DCKT000037_01
<惡夢>構成槪要Other materialcopies: 2
원고지에 작성한 <악몽>(유현목, 1968)의 구성 개요(장면 개요)이다. 첫 장에는 "<악몽> 구성 개요"라 쓰여 있고, 다음 장부터 시나리오에 기반해 S#1부터 S#95까지의 장면 리스트가 손글씨로 적혀 있다. 시나리오 상에서는 S#118이 엔딩 장면이나, 개요표에서는 S#95까지만 작성돼 있다. 신 번호, D/N 유무, 장소, 소품 및 때로 간략한 장면 설명 등이 쓰여 있다. 자료의 마지막 장은 원고지 뒷면에 작성된 내용으로, 세트 제작에 관한 메모로 보인다. 다만 다락, 책장, 현관, 트로피장, 부엌 선반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악몽>이 아닌 다른 작품의 세트 제작 관련 메모로 여겨진다.
악몽 · 1960년대 · 제작실무자료 · 온라인 열람
ZK0000533_01
撮影豫定表Other materialcopies: 2
<악몽>(유현목, 1968)의 1967년 5월 28일 오후 촬영 예정표이다. 촬영일정표 양식에 신 번호, D/N, 장면(장소), 출연인물 등이 표시되어 있다. 뒷장에는 상단에 "악몽"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장면 목록이 기재돼 있는데, S#93A부터 S#108까지 장면의 장소나 간략한 상황이 적혀 있다. 시나리오와 비교해 보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다.
악몽 · 1960년대 · 제작실무자료 · 온라인 열람
ZK0000534_01
민족의 태양=성웅 이순신Scripts and storyboardscopies: 2
1962년 4월에 개봉한 영화 <성웅 이순신>(유현목) 시나리오로, 표지에 <민족의 태양>이라는 제명이 적혀 있다. 이은상 작가가 집필했다. 시나리오 앞부분에는 서언과 제호의 변이 길게 적혀있다. 서언에는 "1957년 음력 3월 8일 노산"이라고 쓰여 있어 작성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데, 영화화에 대한 당부의 말도 있어 영화 <성웅 이순신> 시나리오의 초고로 추정된다. 시나리오의 페이지 구성을 보면, 상하단으로 나뉘어 있고 상단에는 대사가, 하단에는 낭독 내레이션이 적혀 있다. 임진난의 개전부터 노량해전까지 "선조의 몽진, 피난민 군상, 한산도 생활, 백의 종군, 어머니의 별세, 명량해전" 등을 다루며 29개의 소제목으로 사건들을 구성했다. 마지막 "29. 노량작전"에서 임진란 7년의 마지막 해인 무술년 11월 19일 새벽 노량에서의 마지막 해전 장면이 등장하는데, 엔딩 타이틀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다음 장이 있을 여지가 있다. <성웅 이순신>은 1959년 10월 2일 경복궁 근정전 오픈세트에서 크랭크 인에 들어갔고(동아일보 1959.10.07., 4면), 세연영화사 제작, 이은상 각본, 유현목 연출, 김학성 촬영, 김성춘 조명으로 진행되었으나 1959년 말에 촬영이 중단된 듯 보인다(조선일보 1960.01.16., 4면; KMDb의 스태프 정보를 보면 이 작품의 조명은 최은성이 맡았다). 이후 공보부가 2억 환의 예산으로 설치한 영화금고의 대여금 지원을 받은 첫 작품으로(경향신문 1962.02.15., 4면), 1962년 1월 촬영을 재개해 남한산성에서 수방사 장병들을 동원한 대형 몹씬을 촬영했고, 해전 신의 미니어처 촬영은 일본 동보스튜디오 특수촬영팀에서 8년간 연구한 서울 공대 권진규가 맡았다(동아일보 1962.01.08., 4면). 공보부 영화금고에서 3천만 환을 빌리고 총 4억의 예산으로 만들었다. 1962년 3월 촬영을 마쳤는데, 엑스트라 30만, 마필 2만, 2500척 넘는 선박과 거북선 실물대 12척이 쓰였다고 한다(경향신문 1962.03.19., 4면).
성웅 이순신 · 1960년대 · 시나리오
CKN002738_01
맹선 모형도Other materialcopies: 2
<성웅 이순신>(유현목, 1962)의 해전 장면을 위한 군함 이미지 자료로, 연필로 그린 스케치에 채색한 수채화이다. 왼쪽 상단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귀선(거북선)"과 조선 초기의 군선인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이 있고 오른쪽 하단에는 "판옥선(板屋船)"이라고 적었다가 "판옥(板屋)"을 빗금으로 지운 흔적이 있다. 판옥선은 이름 그대로 널판지로 선체 위 전면을 덮어 2층으로 만든 함선인데, 그림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성웅 이순신>(유현목, 1962)은 1959년 세연영화사에서 제작에 들어갔으나 자금난 등으로 중단되었다가 1962년 촬영을 재개해 완성, 1962년 4월 14일에 개봉했다. 1959년 말 현재, 7척의 실물 거북선이 건조 중이며 수백 척의 선박이 동원될 예정(동아일보 1959.11.27., 4면)이었으나 재정난으로 촬영이 중단되는 바람에 해전 장면 촬영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962년 1월, 공보부에 설치된 영화금고의 재원을 대여 받아 촬영을 재개해 해전 장면 등을 촬영했고, 이때 2,500척 넘는 선박과 거북선 실물대 12척이 쓰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62.01.08., 4면; 경향신문 1962.03.19., 4면 참조). 이 작품의 마지막 촬영은 미아리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미니어처 해전으로, 당대 신문기사에는 이때의 촬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인솔하는 대군의 왜선에 맞서 원균이 일전을 벌이나 이순신이 없는 아군이 무참히 패퇴하는 신이다. 50여 평의 인조 풀에 모형 군선 127척을 띄웠고, 2척대(二尺大)의 모형 군선에는 대포까지 가설했다. 포구에 설치한 화약 장치에 회로를 연결해 스위치를 누르는 대로 터지도록 했고, 물 속에 시설한 화약이 터져 배에 불이 붙게 하는 등, 해상 화전을 연출했다. 거북선의 노는 내부의 소모터로 움직이게 했고, 군선들은 배 밑에 철사를 달아 이동시켰다. 이 촬영은 본격적인 미니어처로는 한국에서 최초, 최대 규모였는데, 특수 미술을 담당한 권진규는 일본 동보스튜디오에서 세계적 특수미술가 단곡(丹谷)과 더불어 7년을 경험했다고 전해진다(동아일보 1962.03.29., 4면 참조).
성웅 이순신 · 1960년대 · 제작실무자료 · 온라인 열람
ZK0000635_01
촬영 일정 메모Other materialcopies: 2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의 촬영 일정표(일부)이다. 2쪽 분량으로, 콘티 용지 뒷면에 일부 장면의 촬영 일정을 적어 놓았다. 3일과 5일, 7일의 촬영 일정으로, 날짜별 촬영 장소와 그에 해당하는 장면, 간단한 기상 및 등장인물 등이 적혀 있다. 3일에는 인천에서 바닷가 장면에 해당하는 S#85, S#34, S#2, S#91A, S#90을 촬영했으며, 5일에는 삼성 스튜디오 앞에서 S#75, S#78, S#49, S#51 등을, 그리고 망우리에서 용란과 한돌이 등장하는 무덤과 죽림 장면(S#32) 및 숲속 장면(S#79) 등을 촬영했다. 밤 장면에는 신 번호 옆에 (N) 표시가 적혀 있다. 7일에는 창동에서 S#46, S#47 ,S#48 등을 촬영했다. 컬렉션에 소장된 「<김약국의 딸들> 콘티: S#2~S#91A (일부 신 누락)」(관리번호 DCKT000034_01, 이하 '콘티')의 S#46~48 개요 페이지 상단에 "3월 7일 밤"이라는 날짜와 시간대가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자료에 적힌 날짜는 각각 3월 3일과 5일, 7일로 추정된다. 한편 제작사 극동흥업이 공보부에 제출한 「영화제작신고서」에는 착수연월일이 "1963, 1월 15일"로 적혀 있어, 보다 구체적으로 1963년 3월 3일~7일의 촬영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자료 외에 <김약국의 딸들> 콘티에도 일부 신 개요문에 촬영 날짜가 적혀 있어, 두 자료를 함께 교차, 비교해 봐도 좋을 것이다.
김약국의 딸들 · 1960년대 · 제작실무자료 · 온라인 열람
ZK0000505_01
연출부 헌팅 노트Other materialcopies: 2
시판 공책에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촬영을 위한 헌팅지 사진을 정리해 붙여 놓았다. 표지에는 손글씨로 "MEMO, 김약국의 딸들, 연출부"가 적혀 있다. 공책에는 매 쪽마다 두 장의 사진이 붙어있고, 사진 아래에는 장소가 적혀 있다. 헌팅 장소로는 충열사 입구, 조선장(造船場, 少), 나룻터 부근(여수행), 선상에서 본 조선장(대), 나룻터 측면(선창), 고성반도에서의 부감, 충열사 측면, 선상에서 본 부두가, 시장부 선창가 등이 빨간 색연필로 적혀 있다. 한편 김 약국네와 관련된 사진에는 검은 볼펜으로 장소가 적혀 있다. "김약국집 대문, 삼성스튜디오"라고 적혀 있고, 그 밖의 사진 주위에는 "김약국집 사랑방과 마당, 대문 뒤 바같채, 사랑채에서 대문을 보다" 등이 적혀 있는데, 삼성 스튜디오에 세트를 지을 때 참고한 듯하다.
김약국의 딸들 · 1960년대 · 제작실무자료 · 온라인 열람
ZK0000507_01
衣裳一覽表Other materialcopies: 2
원고지에 빨간 볼펜으로 적은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의상일람표이다. 때로 파란 볼펜으로 추가한 내용도 있다. 원고지 1~2쪽에 모든 배역의 의상과 헤어가 출연진마다 A, B, C, D 등으로 정리되어 있고, 상단에는 쪽번호가 적혀 있다. 2쪽 하단에 S#1~10까지 석원, 봉룡 등의 의상 일람이 거꾸로 적혀 있는 한편, 원고지 3쪽부터 10쪽에 걸쳐 S#13부터 S#93까지 매 신마다 등장인물의 의상일람(A 혹은 B 혹은 C 등)이 적혀 있다.
김약국의 딸들 · 1960년대 · 제작실무자료 · 온라인 열람
ZK0000506_01
푸른 산맥=푸른 꿈은 빛나리Scripts and storyboardscopies: 2
이 시나리오는 일본 작가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의 동명의 작품을 유한철이 각색한 것으로, 극동흥업에서 제작한 영화 <푸른 꿈은 빛나리>(유현목, 1963) 시나리오의 한 버전이다. 시나리오 뒤에 극장, 촬영소, 미장원 등 영화 관련 업체 및 영화배우 등의 전화번호가 기재된 "1963년 4월 전화번호부"가 별첨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시나리오는 1963년 4월 중에 인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나리오 표지에 유현목 감독의 이름은 없다. 별도의 스태프 목록이 없는 이 시나리오의 캐스트 페이지에는 몇몇의 배우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는데, 백난희 선생 역에는 '엄앵란', 문진영 여고 교의(敎)이자 문병원장 역에는 '김진규', 학생 박영숙 역에는 '태현실', 선생 송벽두 역에는 '허장강'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 영화에서는 백난희 선생 역을 유수미애가 맡았다. 이 시나리오(이하 '<푸른 산맥> 시나리오')는 「<푸른 꿈은 빛나리> 시나리오(유현목 보관용)」(관리번호 CKN002509_01, 이하 '유현목 보관용 시나리오')과 다른 점이 존재한다. 먼저 <푸른 산맥>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 영숙이 계란 대신 쌀을 팔러 윤구(<푸른 꿈은 빛나리>에서는 상렬)가 있는 철물점에 가고, 이혼한 영숙의 친모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모친이 걱정되는 마음에 영숙은 쌀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관상쟁이에게 점을 치러 가는데, 이때 동행했던 윤구의 모습을 보고 영숙의 동급생들이 둘을 연인 사이로 오해하며 사건이 시작된다. 그러나 유현목 보관용 시나리오에서는 영숙이 동급생 옥희의 교복을 망쳐 물어주기 위해 부친이 하는 양계장의 계란을 팔게 되고, 영숙이 상렬(<푸른 산맥>에서는 윤구)이 있는 철물점에 들어가 계란을 팔던 중 우연히 쥐를 보고 놀라 상렬에게 쓰러지는데, 둘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그들의 사이를 동급생들이 오해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다. 그 밖에도 <푸른 산맥> 시나리오의 S#32 윤구의 부모가 영숙을 며느리감으로 두고 대화하는 장면, S#55 바다에서 영숙과 윤구가 조정을 하며 대화를 나누던 중 불량배를 만나 싸우는 장면 등이 유현목 보관용 시나리오와 다르다.
푸른 꿈은 빛나리 · 1960년대 · 시나리오
CKN002508_01
몽땅 드릴까요(토끼와 포수)Scripts and storyboardscopies: 2
<몽땅 드릴까요>(유현목, 1968) 시나리오이다. 표지에는 타이틀 아래에 "원명 토끼와 포수"라고 적혀 있고, 세로 글씨로 "동아연극상 작품 대상 및 창작희곡상 수상 작품!"이라 쓰여 있다. 좌측 하단에 손글씨로 "유현목 용"이라 적혀 있으며, 그 아래에는 태창흥업의 마크가 찍혀 있다. 스태프 페이지는 일부 유실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나리오에는 편집/현상/소품 등의 스태프 이름이 기재된 면만 남아 있다. 한편 시나리오에는 제작부장을 최재호가 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실제 영화의 공식 크레디트에는 한진섭이 담당했다. 아마도 제작 단계에서 교체된 듯하다. 그 밖에 등장인물 중 시나리오의 곤충연구소 미스 하 캐릭터는 실제 영화에서 어린이로 대체되었다. 시나리오에는 S#1 타이틀 장면부터 S#88 엔딩 장면까지가 수록돼 있는데, 실제 영화는 타이틀이 등장한 후 시나리오의 S#9부터 시작한다. 시나리오 중간 중간에 삭제를 지시하는 표시들이 발견되는데, 삭제 지시된 장면들은 완성된 영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편 시나리오에는 대사들을 줄콘티 식으로 컷을 나눠 숫자를 달고 카메라 워크를 표기해 놓거나 상단에 카메라 포지션을 그려놓은 경우들이 발견된다. 신 중간에 장소를 바꿔 27A, 27B 등의 추가 신을 작성해 넣기도 했다.
몽땅 드릴까요 · 1960년대 · 시나리오
CKO002725_01